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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우크라 위로한 베네치아, 따뜻한 연대의 작품들 빛났다

등록 2022-04-24 18:14수정 2022-06-19 19:06

[노형석의 베네치아 아틀리에] ⑥

비엔날레 총감독 알레마니는
주제로 ‘꿈의 우유’ 내걸었지만
전쟁 탓 ‘평화 연대’ 핵심 화두로
곳곳에 우크라 위한 특별공간

여성예술가 비중 80% 역대급
‘국가관·본전시’ 양대 황금사자장
모두 흑인여성 작가가 석권도
베네치아 시내 서북쪽 우크라이나 특별전시관에 나온 우크라이나 아이의 대형 초상 조형물. 프랑스 아티스트 제이아르가 피난민인 다섯잘짜리 소녀 발레리아의 모습을 키워 만들었다.
베네치아 시내 서북쪽 우크라이나 특별전시관에 나온 우크라이나 아이의 대형 초상 조형물. 프랑스 아티스트 제이아르가 피난민인 다섯잘짜리 소녀 발레리아의 모습을 키워 만들었다.
“하일 히틀러! 하일 히틀러!”

알몸에 온통 황금색 칠을 하고 머리에는 깃을 단 건장한 남자가 두 손 높이 쳐들며 연신 외쳤다. 1930년대 독일인들이 인류사 최악의 전쟁범죄자가 된 독재자 히틀러를 찬양하며 주고받던 나치즘의 구호다. 남자가 선 곳은 러시아 이름이 새겨진 동화 속 집 같은 모양새를 한 전시관 건물 앞. 저녁 무렵 돌연 나타나 건물 벽에 전쟁을 뜻하는 러시아 말 ‘Война’(보이나)를 낙서하듯 휘갈긴 뒤 구호를 3분여 동안 계속 내뱉던 그는 무장경찰에 끌려 나가면서도 “하일 히틀러”를 연호했다.

지난 21일(현지시각) 저녁 지구촌 최대의 미술축제 베네치아 비엔날레가 펼쳐진 이탈리아 베네치아 시내 카스텔로 공원 국가관 전시 구역의 러시아관에서 돌발적인 해프닝이 벌어졌다. 러시아관은 지난 2월 시작된 러시아군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항의해 전시를 준비 중이던 기획자와 작가들이 출품 철회를 선언하면서 폐관된 상황이었다. 그런데 굳게 닫힌 전시관을 대상으로 벌거벗은 남자가 예민한 나치즘 구호 퍼포먼스를 감행한 것이다. “하일 히틀러”를 외친 것이 침공을 감행한 러시아 통치자 블라디미르 푸틴을 빗대어 풍자한 것인지, 아니면 독일, 러시아 등에서 기승을 부리는 극우세력이 실력 행사를 한 것인지 명확한 진상은 드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촉발된 비극이 전세계 예술인들의 현실참여적인 성향을 자극하고 평화 연대로 이어지는 반향을 일으키며 이번 비엔날레의 핵심 화두로 떠올랐다는 것은 자명해 보였다.

굳게 닫힌 러시아관 앞에서 한 남자가 알몸에 황금빛을 칠하고 “하일 히틀러” 구호를 외치며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굳게 닫힌 러시아관 앞에서 한 남자가 알몸에 황금빛을 칠하고 “하일 히틀러” 구호를 외치며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때문에 위안과 연대, 교감은 81개국이 국가관에 출품한 이번 비엔날레에서 어떤 화두보다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비엔날레 총감독인 체칠리아 알레마니는 ‘꿈의 우유’란 환각적인 주제로 팬데믹 이후 우리 삶과 몸의 감각을 다기한 각도의 작품들을 통해 재조명하고 활성화시키려는 의도를 표출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따듯한 교감과 연대감을 주는 작품들이 관객의 눈길을 잡아 끌었다.

카스텔로 공원 안에 들어선 우크라이나 임시 광장의 모습. 모래가 든 흰 포대들로 쌓아 올린 탑 주위로 전란의 참상을 담은 우크라이나 작가들의 그림과 이미지들을 붙인 목재 전시대들이 도열하듯 설치됐다.
카스텔로 공원 안에 들어선 우크라이나 임시 광장의 모습. 모래가 든 흰 포대들로 쌓아 올린 탑 주위로 전란의 참상을 담은 우크라이나 작가들의 그림과 이미지들을 붙인 목재 전시대들이 도열하듯 설치됐다.
실제로 비엔날레 곳곳에는 우크라이나를 위한 특별한 공간들이 마련됐다. 옛 조선소 터인 아르세날레 안쪽 건물 2층에 있는 파울로 마코우 작가의 우크라이나 국가관을 필두로 카스텔로 공원 들머리를 지나 본전시관과 미국관 사이에 우크라이나 임시 광장이 차려졌다. 광장에는 모래를 담은 흰 포대를 탑처럼 쌓아 올리고 주위에 프린트된 그림과 이미지들을 붙인 나무판 전시대를 꽂아놓듯 설치했다. 관객들은 이 전시대에서 작가들이 우크라이나 현장에서 전해온 참상의 기록과 전란을 형상화한 작업들을 볼 수 있다. 헤어질 상황에 대비해 아이 몸에 인적사항을 문신처럼 적어놓는 엄마의 모습과 놀이터 놀이기구를 차폐막 삼아 총을 겨눈 군인의 모습 등을 담은 작업들이 눈에 아리게 들어왔다.

베네치아 시내 서북쪽에 핀추크 재단이 주관해 개설한 우크라이나 특별전시관. 우크라이나 국기를 배경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의 평화 연대 호소 친필을 넣은 펼침막이 인상적이다.
베네치아 시내 서북쪽에 핀추크 재단이 주관해 개설한 우크라이나 특별전시관. 우크라이나 국기를 배경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의 평화 연대 호소 친필을 넣은 펼침막이 인상적이다.
우크라이나에 뿌리를 두고 국제적인 예술후원 활동을 해온 핀추크 재단은 베네치아 서북쪽 스쿠올라 그란데 지구의 운하 옆 대형 건물을 통째로 빌려 우크라이나 작가들과 마리나 아브라모비치, 올라푸르 엘리아손, 데이미언 허스트, 무라카미 다카시, 제이 아르(JR) 같은 같은 세계적인 미술 대가들의 협업 성과물을 선보이는 중이다.

전시장 건물엔 노랑과 파랑이 어우러진 우크라이나 국기를 내걸고 연대를 호소하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의 글을 적어놓은 대형 펼침막이 내걸려 눈길을 끌었다. 층고가 높은 전시장 안에서는 세부 장르들을 망라한 여러 나라 작가들의 다채로운 작품들이 반전·평화의 메시지 아래 어우러져 관객들을 맞고 있다. 특히 2층 대형홀로 올라가는 계단 부분에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100년 넘은 등대의 대형 등을 가져와 평화의 빛을 쏘는 광경은 관객들에게 숙연한 울림을 던졌다. 우크라이나 피난민인 다섯잘짜리 소녀 발레리아의 앳된 모습을 확대해 만든 프랑스 아티스트 제이 아르의 대형초상 조형물이나 모조해골이 붙어 덜렁거리는 옷을 입고 어린이 합창단의 평화 공연을 지휘하는 아브라모비치의 영상물, 몸의 곳곳이 처참한 몰골로 깨어져 나간 데미언 허스트의 청동제 임산부상도 시선을 붙잡는다.

우크라이나관에 나온 대표작가 마코우의 설치작품 <고갈하는 샘>은 비엔날레가 개막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의 새로운 상징으로 부각되고 있다 . 마코우가 30년 전부터 드로잉 등을 통해 계속 구상하며 발전시켜온 이 작품은 물을 아래로 흘려보내는 78개의 깔때기가 삼각형을 이룬 얼개가 특징이다. 원래 자원과 인간성의 고갈, 시간의 숙명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구상했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상황과 만월기에는 바닷물이 도시를 뒤덮으며 점점 물속으로 가라앉는 베네치아의 비극적인 환경이 최근 어우러지면서 더욱 의미심장한 작품이 됐다. 작가는 이런 맥락에서 베네치아의 만월기 바다 홍수를 일컫는 현지어인 ‘아콰 알타’를 제목에 추가해 화제가 됐다.

베네치아 시내 서북쪽 우크라이나 특별전시관의 1, 2층 사이 계단부에 거장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출품한 등대의 대형 조명등 설치작품.
베네치아 시내 서북쪽 우크라이나 특별전시관의 1, 2층 사이 계단부에 거장 올라푸르 엘리아손이 출품한 등대의 대형 조명등 설치작품.
비엔날레의 양대 축인 본전시와 국가관 전시는 여성 예술가들의 비중이 역대 어느 때보다 커졌다. 본전시장인 ‘아르세날레’ 전시관 입구에 들어선 미국관 최초의 흑인 여성 단독 출품작가 시몬 리의 거대한 흑인 여성 흉상이 보여주듯 알레마니는 전체 출품작가 280여명 가운데 여성 작가의 비중을 80% 넘게 파격적으로 늘렸다. 소수민족, 장애인 등 지구촌 비주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들도 대거 등장시켰다. 서구 등 주류 사회에서 몰랐던 페미니즘 대가들의 다기한 작품과 장애인, 성소수자 등의 미세한 이야기들로 풀어나가는 작업을 볼 수 있었다.

국가관상을 받은 영국관 전시장. 흑인 여성으로는 역대 첫 출품작가가 된 소니아 보이스가 네명의 흑인 가수들과 함께 협업한 창작과 기록 작업의 면면들을 전시했다.
국가관상을 받은 영국관 전시장. 흑인 여성으로는 역대 첫 출품작가가 된 소니아 보이스가 네명의 흑인 가수들과 함께 협업한 창작과 기록 작업의 면면들을 전시했다.
수상 결과도 이런 양상을 전적으로 반영했다. 흑인 가수들과 독특한 형식의 음악적, 시각적 협업을 벌이면서 이들의 소외된 음악사적 발자취를 드러낸 흑인 여성예술가 소니아 보이스의 근작들을 역대 처음 대표작으로 출품한 영국관에 국가관상을, 역시 미국관 최초의 흑인 여성 작가로 출품한 시몬 리에게 최고 작가상을 줌으로써 양대 황금사자상을 모두 흑인 여성 작가들이 거머쥐게 됐다. 주목할 만한 언급 상을 받은 프랑스관의 알제리계 기획자 지네브 세디라까지 포함하면 가히 흑인 여성 예술가들의 열풍이 거세게 일어났다고 할 만하다. 하지만 본전시의 얼개나 내실 측면에서 비판적인 시선도 적지 않았다. 카타리나 프리치, 세실리아 비쿠냐 같은 원로 여성 거장들과 중견·소장 작가들의 작품 안배와 세부 장르 구성의 짜임새 등은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는 의견들이 잇따랐다. 섬유직물이나 세밀한 도상으로 구성된 유명 여성 작가들의 기존 작품들을 ‘여성성’이나 ‘몸’이란 화두만을 강조한 채 진부한 구도로 병렬시키거나 중복시킨 경우가 많아 ‘포목점’ ‘잡화점’을 연상시킨다는 촌평이 나오기도 했다.

미국관 들머리에 나온 출품작가 시몬 리의 작품. 허리 굽히고 일하는 과거 흑인 여인의 모습을 시커먼 수조 위 시커먼 조상의 모습을 통해 강렬하게 형상화했다.
미국관 들머리에 나온 출품작가 시몬 리의 작품. 허리 굽히고 일하는 과거 흑인 여인의 모습을 시커먼 수조 위 시커먼 조상의 모습을 통해 강렬하게 형상화했다.
국가관들의 경우도 바라보는 시선들이 차가운 편이었다. 국내외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전반적인 콘텐츠 수준이 역대 가장 낮다는 혹평이 제기됐다. 자국 국가관을 소국 에스토니아에 양보하고, 우크라이나 특별전시관 옆의 옛 예배당으로 옮겨 몸 덩어리들의 잔치를 연 네덜란드관이나 소수민족 사미족의 삶 이야기를 공통의 문화적 뿌리로 내세운 스칸디나비아관의 초국가적 시도가 돋보이긴 했지만, ‘꿈의 우유’ 맛을 느낄 만큼 신선하고 파격적인 요소들을 보여줬는지는 의문이다.

국가관 부문과 최고 작가 부문에서 영국관과 미국관의 흑인여성작가가 나란히 황금사자상을 받은흑인 여성 예술을 부각시켰다는 의미는 크지만 , 미술자체의 맥락보다 서구 미술강국 위주의 최근 문화 트렌드나 정치적 관점에 주로 이끌린 결과가 아니겠느냐는 지적도 대두됐다. 아시아권 여성들의 미술작품은 여전히 주목받지 못했고, 두 흑인 여성 예술가들의 출품작들또한 조형성이나 연출, 구성 측면의 완성도를 넘어 세계인의 보편적 공감이란 측면에서 얼마나 관객에게 다가갔는지는 생각해볼 여지를 남겼기 때문이다.

벨기에관 프랑시스 알리스의 영상물 전시 광경.
벨기에관 프랑시스 알리스의 영상물 전시 광경.
카스텔로 공원의 국가관 감상 여정은 아쉽고 허전했지만, 영상거장 프랑시스 알리스가 출품한 벨기에관의 전시는 다소 달랐다. 지극한 애정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는 작가의 마음과 태도가 예술의 형상이 되어 우러나는 감동의 여운이 깊고도 깊었다. 이 거장은 광산지대에서 타이어를 굴리거나 타이어 안에 들어가 몸을 같이 굴리는 놀이를 벌이는 흑인아이와 갖가지 줄넘기 재주를 부리는 아시아 소녀들의 움직임을 동영상으로 담았다. 저녁 하늘의 하루살이를 잡으며 부르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오묘한 ‘떼창’ 등 세계 곳곳 아이들의 움직임을 다양한 크기의 화면에 포착해 보여준다. 이들이 노는 모습의 세부는 작은 소품 그림과 드로잉 애니메이션으로 담담하게 옮겨 재현하며 내걸었다. 팬데믹 이후 사람들이 갈망해온 가슴 뜨거운 휴머니즘의 진면목을 채굴하듯 전해준 그의 전시장에서 관객들은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않았다.

베네치아/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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