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 연대기>에 수록된 15세기 말 부다(오늘날 부다페스트)의 모습.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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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0년 피렌체의 ‘대인’(일 마니피코) 로렌초 데메디치에게 흥미로운 책 한 권이 헌정되었다. 남다른 “권위”와 “풍부한 학식” 그리고 “보편적 덕”의 소유자로서 로렌초야말로 고금을 막론하고 “위대한 왕”으로 불리기에 손색없다는 찬사와 함께였다. 물론 여기에는 공동체의 덕성에 관해 다룬 이 책이 실상 군주와 다를 바 없는 이 피렌체의 지배자에게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저자의 바람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이 책과 저자에 대한 관심이 거의 전무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아마도 로렌초에게 그것은 결코 환영받지 못했던 듯하다. 이 책이 바로 브란돌리니가 1489년경 집필하기 시작해 이듬해 마무리한 <공화국과 군주국의 비교>다.
17세기의 한 저작에 삽화로 남아 있는 브란돌리니의 초상.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소장
1454년 피렌체 중산층 가문에서 태어난 브란돌리니는 남다른 이력을 지닌 흥미로운 인물이다. 10대 초반 경제적 이유로 고향에서 쫓겨난 가족과 함께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그는 나폴리에서 처음 고전교육을 접했고, 이후 나폴리와 로마에서 뛰어난 시인이자 문학교수로서 명성을 얻으며 휴머니스트 지식인의 입지를 다졌다. 어릴 적 앓은 선천성 안구질환으로 평생 거의 앞을 볼 수 없었던 신체의 결함을 이겨내고 얻은 결실이었다. 이런 그에게 서른 중반 무렵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고전학문에 심취해 헝가리를 새로운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지로 일구려던 그곳의 왕 마티아스가 그를 수사학 교수로 초빙했던 것이다.
아이러니일 수도 있지만 마티아스의 때아닌 죽음으로 브란돌리니가 헝가리 부다의 궁정에 머문 기간은 그저 수개월에 그쳤다. 하지만 이 짧은 기간 그는 르네상스 정치사상의 역사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의미있는 저작 <공화국과 군주국의 비교>를 착상하고 집필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교육논고의 색채를 띠고 상반된 견해를 지닌 두 대화자를 등장시킨다는 점에서, 외견상 이 작품은 전통적인 휴머니스트의 대화체 도덕논고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질문과 응답을 통해 하나의 진리를 추구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의도적으로 차용해 군주국이 공화국보다 우수하다는 점을 밝히려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당대의 다른 작품들과 뚜렷이 구별된다.
15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는 크고 작은 도시국가들이 제각기 안정적인 자리를 잡아가면서 군주정과 공화정의 상대적 우수성을 주장하는 정치논고들이 유행처럼 등장했다. 그런데 다음 세기 초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가 예증하듯, 그들 대부분은 한 작품에서 하나의 정체를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와 달리 브란돌리니는 상반된 두 정체를 함께 논의하고 비교의 관점에서 평가했던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군주국의 우월성을 논증하기 위해, 당대의 다른 이들과는 달리 로마가 아니라 고대 그리스의 정치 관행과 사상에 주목했다.
모든 논의는 대외적으로는 강력한 “군사적 능력”과 “영예”의 추구 그리고 내적으로는 “정의와 절제”의 원리에 기초한 삶이 국가가 존속하고 발전하기 위한 근간이라는 단순한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물론 군주정의 우월성이 강조되는 것도 바로 그 점을 구체적으로 논증하기 위해서다. 아무튼 이를 위해 브란돌리니는 “자유”와 “정의”라는 열쇳말을 통해 두 정체를 비교한다. 그에 따르면 피렌체는 물적 탐욕에 기초한 상인들의 국가이며, 따라서 그곳에서는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부유층을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고 그 결과 누구도 평등할 수 없다. 통제되지 못한 사적 소유가 ‘정의와 절제’라는 공동체의 근본원리를 훼손한다는 것이다.
이를 고려하면 그리스의 정치가 솔론을 인용해 법은 한낱 “거미줄”과도 같다고 조소하는 브란돌리니의 모습은 사뭇 인상적이다.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잡을 수는 있지만 강자들에 의해서는 쉽게 끊어지곤 하는 거미줄처럼, “부유한 이들은 법의 구속에서 벗어나는” 반면 “가난한 이들은 법의 그물 속에 갇혀버린다”는 신랄한 비판이다. 피렌체인들이 시민들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는 제도로 옹호하던 추첨식 선거 역시 마찬가지다. 브란돌리니는 제한된 비밀선거로 인해 피렌체 같은 공화정부 아래에서는 “선한 이들은 정당한 보상을 받지 못하게” 되고, 그와 반대로 “악한 이들은 합당한 처벌을 피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선거제도의 맹점에 대한 조숙한 선견이 아닐까?
아무튼 피렌체가 자랑하던 법적 평등과 선거에 기초한 정치 참여의 권리가 브란돌리니에게는 그저 허울뿐인 말장난이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피렌체인들의 온갖 수사에도 불구하고 그 꽃의 도시는 결코 자유롭지도 또 정의롭지도 못하다는 일갈인 셈이다. 따라서 그에게 좋은 정부는 부가 곧 권력이 되는 피렌체식의 공화주의 헌정 체제에서 구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최고의 덕을 갖춘 군주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분열보다는 조화를 그리고 사적 이해보다는 공공선을 지향하는 군주국이 진정한 의미에서 좋은 정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덕의 함양을 통해 사회의 병폐를 해결하려던 페트라르카 이래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의 도덕관이 깃들어 있는 셈이다.
15세기 후반 만테냐가 그린 헝가리 왕 마티아스의 초상화. 위키피디아
물론 군주정을 옹호하는 브란돌리니의 논리는 다분히 편파적이다. 메디치 집권 이후 시민정신과 공민윤리가 퇴색해가던 피렌체의 ‘현실’이 공화정을 비판하는 주된 논거가 되는 반면, 군주정의 우수성을 입증하기 위해 덕과 용기를 갖춘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이 강조되기 때문이다. 그 속내는 차치하더라도 브란돌리니는 휴머니스트 군주임을 자임하던 마티아스에게서 이런 이상적인 군주의 모습을 찾으려 했다. <공화국과 군주국의 비교>에서 그가 마티아스에게 군주정을 옹호하는 주 대화자의 역할을 맡겼던 것도 분명 그 때문이다. 하지만 마티아스의 죽음과 함께 그는 부다의 궁정을 떠나야 했고, 결국 고향 피렌체로 돌아왔다.
실상과는 무관하게 공화국임을 소리 높여 자랑하던 피렌체의 지배자에게서는 결코 바랄 수 없는 기대였을까? 브란돌리니는 로렌초에게 또 다른 마티아스를 기대했지만 아무런 답을 듣지 못했다. 이후 그는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입회해 길지 않은 남은 생을 수도사로 살아가며 조용히 역사의 뒤꼍으로 멀어졌다.
르네상스는 말과 글을 통해 고대 세계를 부활시키려던 지적 운동이었다. 14세기 이후 백가쟁명의 지성사를 검토하는 ‘르네상스와의 대화’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