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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약관의 천재, 철학에서 인간다움의 길을 구하다

등록 2022-02-05 09:16수정 2022-02-05 09:34

[한겨레S] 임병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
피코 델라 미란돌라

고금 모든 사상을 하나로 종합해
교회 놀라게 한 반항적인 지식인
언어 천착하던 수사학 이상 넘어
“철학만이 진리추구의 길” 주장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15세기 피코의 초상화. 위키미디어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된 15세기 피코의 초상화. 위키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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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6년 이탈리아 지성계는 스물세 살의 젊은 학자가 내놓은 저작 하나 때문에 일대 혼란에 빠졌다. 그 책이 바로 거의 최초로 교황청이 금서로 지정한 피코의 <900 논제>였다. 전통적인 기독교 관념뿐만 아니라 고대 이집트의 비교 전통과 유대교의 카발라적 견해 역시 포함해 고금의 모든 사상을 하나의 지적 체계로 집대성하려던 피코의 야심찬 시도와 그 아래에 흐르던 이단의 그림자가 문제였다. 더욱이 강경한 교황청에 맞서 피코는 이듬해인 1487년의 공현축일에 맞추어 그에 관한 공개토론회를 열자고 이야기했다. 원하기만 한다면 누구든 참석할 수 있고 그와 관련된 모든 경비조차 자신이 모두 부담하겠다는 대담한 제안이었다.

철학, 인간 정신의 심장과 같아

물론 단지 그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지만, 결국 교황의 반대로 토론회는 열리지 못했고 <900 논제>는 불온한 서적으로 낙인찍힌 채 세인들의 시선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피코는 바로 그 사건을 통해 소위 르네상스 정신의 화신으로 남게 된다. 그가 그 토론회의 첫머리 연설로 준비했지만 당시에는 공개될 수 없었으며 그의 사후에야 비로소 빛을 보게 된 논고 <인간 존엄성에 관한 연설>(이하 <연설>) 덕분이다. “인간이란 얼마나 위대한 기적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면서 피코는, 적어도 외견상, 인간의 자유의지를 소리 높여 예찬했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불멸의 존재로 상승할 수 있고 또 보잘것없는 필멸의 존재로도 전락할 수 있는 자기 생의 “조형자”요 “조각가”라는 주장이었다.

모데나 근처의 작은 도시 미란돌라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피코는 일찍부터 남다른 명민함을 자랑한 신동이었다. 어릴 때부터 고전을 공부했던 피코는 페라라에서 본격적으로 철학에 입문했고 이후 파도바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아베로에스의 사상을 접했으며, 그 결과 약관의 나이에도 1480년대 초반에는 피렌체의 플라톤 아카데미에서 피치노 등 당대 최고 지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였다. 게다가 1485년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학자로서의 그의 명성과 권위는 한층 탄탄해졌다. 이런 그가 스스로 “새로운 철학”(nova philosophia)이라고 명명한 것에 기초해 지식의 문제에 접근하고 그 결과물로 내놓은 것이 바로 <900 논제>였다.

라파엘로의 &lt;아테네 학당&gt; 가운데 피코로 추정되는 인물의 초상. 위키미디어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 가운데 피코로 추정되는 인물의 초상. 위키미디어

그렇다면 <연설>은 독립된 작품이라기보다 미처 해명하지 못한 <900 논제>에 대한 변론에 가깝다. 더욱이 이를 고려하면 <연설>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세간의 오해와 달리 인간에 대한 예찬이라기보다 학문, 더 엄밀히 말해 ‘철학’에 대한 옹호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르네상스 지식인들 사이에서 수사학과 철학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할 것인가의 문제는 끝없는 쟁론이었지만, 대부분의 휴머니스트들은 철학을 그저 무미건조한 사변으로 폄훼하며 키케로 전통에 기초해 웅변력을 갖춘 인간을 최고의 존재로 평가했다. 피코는 바로 그와 같은 당대 지식인들에 맞서 철학의 가치를 새롭게 정립하려던 이단아였다.

1485년 그가 베네치아의 휴머니스트 바르바로와 나눈 수사학 논전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바르바로가 철학자들을 “저속하고, 조야하며, 교양 없는” 야만인으로 힐난한 것이 발단이었다. 아무튼 이에 대해 피코는 “아마도 불편하기는 하겠지만 우리는 언어 없이도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심장 없이는 결코 살 수 없습니다. 정제된 학문에 능통하지 못한 사람은 교양 있는(humanus) 사람이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철학에 무지한 사람은 인간(homo) 자체가 아닙니다”라고 응수했다. “웅변이라는 마술적인 능력”으로 사물의 본성을 곡해하는 수사가들과 달리, 철학자들은 진리를 규명하는 일에만 몰두한다는 항변이었다. 철학이 인간에게는 곧 심장과도 같다는 주장이다.

고전 수사학에 능통하지 못하다고 자책하던 한 지인에게 보낸 그의 편지도 주목할 만하다. 피코는 “만약 어떤 철학자가 웅변에 능통하지 못하다 해도, 저는 그것에 괘념치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를 위로했다. 철학자의 목적은 오직 진리의 문을 여는 것이며 “나무 열쇠로 열든 황금 열쇠로 열든 그것은 저의 관심사가 아니”라는 이야기와 함께였다. 설령 휴머니스트들이 강조하는 것처럼 학식과 교양을 갖추고 있더라도, 모든 인간을 인간으로 부를 수는 없다는 강력한 표현이다. 말이 아니라 진리 자체에만 봉사하는 철학을 통해서만 비로소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게 된다는 그의 생각이 함축된 듯하다.

피렌체의 한 벽화에 남아 있는 피코의 초상. 가장 왼쪽이 마르실리오 피치노, 가운데가 피코, 그리고 오른쪽의 인물이 아뇰로 폴리치아노로 추정되고 있다. 위키미디어
피렌체의 한 벽화에 남아 있는 피코의 초상. 가장 왼쪽이 마르실리오 피치노, 가운데가 피코, 그리고 오른쪽의 인물이 아뇰로 폴리치아노로 추정되고 있다. 위키미디어

인본주의 인간학의 뼈대 세워

물론 피코는 <연설>에서 자유의지와 가소성이라는 점에 주목해 인간을 예찬했다. 하지만 그가 강조한 것은 결코 인간의 존재론적 지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어떻게’ 인간이 천사와 같은 불멸의 지위에 오를 수 있는가의 문제를 해명하려 했다. 피코에 따르면 쟁론과 투쟁은 자연의 본성이며, 오직 철학만이 그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 철학만이 인간의 영혼을 정화하고 인간을 진리의 세계로 안내하는 지상 유일의 길잡이이기 때문이다. 도덕철학을 통해 정신을 정화하고 변증법과 자연철학의 훈육 아래 이성의 오용을 막을 수 있다는 믿음, 즉 오직 철학만이 인간을 불멸의 존재에 이르게 한다는 이야기다. 의미심장하게도 <연설>의 기저에는 인간이 아닌 철학에 대한 예찬이 흐르고 있는 셈이다.

이를 고려하면 오늘날 널리 읽히는 버전과 조금 다른 <연설>의 초기 판본 하나는 흥미롭기 그지없다. 여기에서 그가 과거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진리를 완전무결하게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광대무변하고 장대한 진리의 세계”와 비교할 때 “인간의 능력은 결코 그것에 비견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디에선가 피코가 영원한 지복의 세계는 오직 종교를 통해 가능하고, “철학이 바로 종교의 시작”이라고 이야기한 것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오늘날 인본주의 인간학의 정초자로 칭송되는 피코는 역설적이지만 그렇게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고 또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의 가치를 부르짖었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르네상스는 말과 글을 통해 고대 세계를 부활시키려던 지적 운동이었다. 14세기 이후 백가쟁명의 지성사를 검토하는 ‘르네상스와의 대화’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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