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세대를 규정하는 신조어가 넘쳐난다. 기성세대가 소비 주체로 상정한 청년의 특성을 설명하기 위한 것인데, 수명은 비교적 짧다. 자본주의 욕망이 청년의 속성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기성세대가 자식 격의 청년들을 관리 감독하기 위해 신조어를 만들고 소비한다는 점도 원인이다. 부모의 권력이나 자본에 따라 성장과 발전의 기회가 다르게 부여되는 불공정한 상황에 대한 청년 세대의 분노와 좌절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신조어가 사회문화적 기능을 수행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 사회의 금수저 논란이 괜한 것은 아니다.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21세기 대한민국의 또 다른 민낯이다.
18세기 왕조 시대 청년은 어떠했을까?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옷소매 붉은 끝동>(문화방송)은 치열하게 자기 주도적 삶을 살아낸 18세기 왕조 시대의 청년을 주목한다. 그는 정치적 적대 세력 때문에 평생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았던 ‘이산’(이준호)의 곁을 지켰던 궁녀 ‘성덕임’(이세영)이다. 그는 생각시 시절 할아버지가 금지한 서적을 읽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서 위기에 처한 어린 세손을 구하려고 본능적으로 책을 찢어버렸다. 나인이 되어서는 궁궐 사람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호랑이를 사냥하고 정치적 위기에 몰린 세손을 구하려고 노회한 임금에게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당돌하지만 맹랑하지 않아 아름다운 청년 성덕임은 누구 못잖게 궁녀로서의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한다. 그래서 궁궐의 권문세도에 맞서 궁녀들의 권익을 지키려 했던 제조상궁은 물론, 생각시 시절 훈육 상궁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한다. 게다가 생각시 시절부터 동고동락했던 동료 나인들을 비롯해 왕실의 여인들이 그한테서 장안의 화제작을 듣고 싶어 할 정도로 말재주가 뛰어나고, 이야기책 필사 능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아버지의 총애에 기대어 안하무인 천방지축 행동하는 화완옹주 때문에 고민하는 중전에게 힘이 되는 계책을 내놓을 만큼 지혜롭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다재다능한 팔방미인이다.
매사 적극적이고 활기차게 자기 삶을 주도하는 그에게 봉건적 신분의 제약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동궁전 나인으로서 세손 저하가 보위에 오르는 날까지 지켜드린다고 다짐하면서도 남자 또한 지조와 절개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로 공사를 구분할 뿐이다. 그에게 매료당한 세손이 “너의 생각, 의지, 마음까지 모두 나의 것이냐?”고 묻지만, “아니옵니다. 궁녀에게도 자신의 의지가 있고 마음이 있습니다. 궁녀 아닌 자들은 알려 하지 않겠지만, 소인은 저하의 사람이지만 제 모든 것이 저하의 것이 아니라 감히 아뢰옵니다”라고 대답할 정도로 당찬 면모를 자랑한다.
성덕임은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궁궐에서 “궁녀로 살기 정말 쉽지 않다”고 푸념도 하지만, 결코 이해타산적으로 처신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손의 후궁이 되어 자기편에 서라는 제조상궁의 불순한 정치적 제안도 거절한다. “태어나서 유일하게 연모한 여인이 너”라는 이산의 개인적인 애정 고백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를 연모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후궁이 되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다른 후궁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교차하면서 승은을 거절한 것이다. 그는 궁녀들의 실종과 죽음에도 정치적 계산을 앞세우는 이산에 격분하다가 “궁녀 주제에 오만하고 방자해”라는 질책을 받아도 물러서지 않는다. 이처럼 그는 전문직 여성으로서 궁녀의 직책에 충실하면서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개척하며 자신의 삶을 주도한 주체적인 존재이다.
정치적 올바름에 입각한 18세기 청년의 언행에 21세기 청년의 반응은 대단히 뜨거웠다. 그가 신분을 초월한 사랑의 주인공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봉건제의 신분적 제약에도 자기 생각과 의지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불의에 맞섰던 성덕임의 언행을 통해 21세기 청년이 지향해야 할 삶의 가치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경제적 불평등과 기회의 불공정은 봉건 왕조 시대 못지않게 심각하다. 권력이나 자본에 의해 봉건적 신분제가 재현된 꼴이다. 그만큼 기성세대가 짜놓은 틀에 갇힌 청년 세대의 각성이 절실하다. 역사적 기록에 대한 허구적 상상력으로 새롭게 탄생한 성덕임의 자기 주도적 삶의 자세가 좋은 본보기가 되길 바란다.
윤석진 대중문화평론가·충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