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중반 독일에서 제작된 발라의 초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1443년 초겨울 로렌초 발라는 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로마의 추기경 루도비코 트레비산에게 편지를 보내, 세 해 전 자신이 쓴 한 책에 대한 소회를 전했다. 이 책이 바로 다음 세기 북유럽의 여러 종교개혁가가 새로운 개혁 신학의 영감을 얻게 되고, 가톨릭교회를 비판하는 묵직한 근거로 환호하게 될 <위작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에 대한 연설>이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 저작에서 발라는 특유의 언어적, 역사적 접근을 통해 중세 내내 교회 중심의 정치 질서를 지탱하던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이 날조된 위작임을 거침없이 폭로했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 발라는 교회나 교황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진실에 대한 사랑”으로 이 책을 썼으며, 이제 그에 대한 판단을 다른 이들의 손에 맡기겠다고 이야기했다.
권위·전통 대신 용례에 주목하며
언어를 변화하는 역사 실체로 이해
발라는 15세기 전반을 풍미했던 지식인 중에서도 가장 성마른 휴머니스트 수사가(역사를 엮고 가다듬는 사람) 였다. 오십 남짓의 그리 길지 않은 인생 동안 그는 기독교 사상과 에피쿠로스주의를 결합해 ‘진정한 선’의 의미를 묻기도 했고, 히에로니무스의 불가타(대중본, 새 라틴어본) <성경>에 문제를 제기하는 등 여러 문제작을 내놓으면서 논란의 중심에 서곤 했다. 또한 발라는 내로라하는 당대 최고 지식인들과 볼썽사나운 논쟁도 결코 피하지 않았던 전투적 인간이었다. 아무튼 이렇듯 시대의 ‘문제아’였음에도, 수사가로서 발라는 그 특유의 언어관으로 북유럽 휴머니즘의 대표 주자 에라스뮈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발라에 따르면 언어는 “관습”에 지나지 않으며, 관습은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 그가 언어를 “권위”나 “이성” 따위의 외적 기준에 의해 고정된 것이라기보다 역사적으로 변화하는 실체로 강조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특히 이와 관련해 발라는 15세기 중엽을 떠들썩하게 만든 언어 논쟁에서 선배 지식인 포조 브라촐리니 에 대한 날 선 비판도 서슴지 않았다. 그가 볼 때 포조는 근거 없는 문법적 추론에 기대 ‘정확하고 올바른’ 라틴어를 강조하면서 언어가 실제로 사용되는 방식을 간과했다. 한마디로 ‘올바른’이라는 올바르지 못한 관념에 근거해 전통과 권위만을 추종하면서 언어가 실제 사용되는 “용례”(usus)를 무시하는 우를 범했다는 이야기였다.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발라의 입장은 소위 ‘역사의식’의 발현을 낳았고, 그것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된 작품이 바로 <위작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에 대한 연설>이었다. 황제의 칙령이라는 외양을 띠고 있는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312년 도시 로마를 함락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종했고, 그 후 약간의 시간이 흐른 뒤인 310년대 중후반의 어느 시점에 그와 당시의 교황 실베스테르 사이에서 이후 서유럽 역사에서 큰 의미를 지니게 되는 중요한 증여 행위가 이루어졌다. 황제가 제국의 서부 지역에 대한 모든 권리를 교황에게 양도했다는 것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을 묘사한 13세기 로마의 프레스코화. 위키미디어
교회의 편에서 생각하면, 이 기증은 교황의 영적 수월성을 확인해주고 세속 세계에 대한 교회의 지배권을 보증하는 역사적 증거였다. 그렇다면 이 증여가 사실임을 확인해주는 문서가 날조된 위작이라는 발라의 주장은 교황의 권위와 그에 기초한 중세의 정치 질서를 그 밑동부터 흔드는 일대 격변과 다를 바 없었다. 더욱이 발라는 거짓 문서에 의존해 세속적 지배를 탐하면서 기독교 교회가 더럽혀졌으며, 만약 이 문서가 위조되었다면 교회가 주장하던 모든 권력의 정당성 또한 그 근거를 잃게 되고 따라서 교황의 권력도 세속 군주들에게 되돌아가야 한다고 소리를 높였다.
물론 그래서였을 테다. 이내 이 저작을 둘러싼 위협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트레비산에게 보낸 편지는 바로 그런 상황이 낳은 일종의 변론이었다. 아무튼 이 같은 정치적 속내는 차치하더라도, 더욱 이목을 끄는 것은 여기에 나타난 ‘조숙한 역사가’로서 발라의 면모다. 무엇보다 그가 특유의 언어학적 방법론을 동원해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을 분석했기 때문이다. 발라는 그 문서에 콘스탄티누스가 살았던 4세기에는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언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당시의 역사적 정황이나 상식에 어긋나는 이야기들이 등장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시대착오 관념과 비판정신을 통해
근대적 역사의식의 선례가 되기도
용례를 강조하면서 사용된 맥락에 따라 언어의 의미를 해명하려던 발라의 언어관이 역사 문서를 해석하는 데에도 작동했던 것이다. 달리 말해 ‘시대착오’라는 관념에 기초해 사건의 변화를 추적하면서 서로 다른 시대의 차이를 판단하는 역사학 고유의 사고가 발라의 <콘스탄티누스 기진장> 비판에 똬리를 틀고 있다. 역사 본연의 ‘시간에 대한 감수성’이 녹아들어 있는 셈이다. 더욱이 그에 더해 발라는 무언가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그것을 곱씹고 재해석하는 비판적인 태도 역시 잊지 않았다. 오만과 독선으로 고대인들의 권위와 전통을 부정한다고 당대인들이 그에게 퍼부은 날 선 비난은 바로 그 점을 겨냥하곤 했다.
이와 관련해 <위작 콘스탄티누스 기진장에 대한 연설>을 쓴 그해 여름, 그가 한 친구에게 던진 질문이 인상적이다. “어떤 분야가 되었든 학문 세계에서 앞선 이들을 비판하지 않고 글을 쓴 이들이 누가 있었는가? 다른 이들의 오류, 그들이 누락하거나 과도하게 진술한 무언가를 날카롭게 지적하지 않는다면, 글을 쓰는 어떤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급진적이고 전투적인 그의 성정이 그대로 담겨 있는 듯하다. 하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비판의식을 놓친다면, 어쩌면 발라를 그저 독선적인 싸움닭으로만 치부하게 될지도 모른다. 조숙한 ‘역사의식’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성마른 지식인 발라는 이렇게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었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발라 언어관의 정수로 평가되는 <라틴어의 우아함에 관하여>의 15세기 필사본. 위키미디어 코먼스
르네상스는 말과 글을 통해 고대 세계를 부활시키려던 지적 운동이었다. 14세기 이후 백가쟁명의 지성사를 검토하는 ‘르네상스와의 대화’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