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소 같은 여자’에서 ‘왕후’로 이미지는 달라졌으나, 화장품 광고 모델로서의 위상만큼은 변함없다. 배우로서의 매력 또한 여전하다. “라면 먹고 갈래요?” 은수가 상우에게 무심한 척 건넨 한마디는 뜨거운 유혹의 은유적 표현으로 오랫동안 회자되고 있다. 영원할 것 같았던 사랑이 깨진 아픔에 시나브로 다시 시작된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용기를 낸 <봄날은 간다>의 은수는 배우로서 이영애의 진가를 세상에 알린 캐릭터였다. 여성으로 조선왕조 최초로 임금의 주치의가 된 장금이(<대장금>)로 이영애는 배우로서 전성기를 구가하게 된다.
멜로 장르에 최적화된 배우라는 이미지가 고착될 즈음 이영애는 박찬욱 감독을 만나 친절해 보이기 위해 눈두덩에 붉은 화장을 한 ‘친절한 금자씨’로 변신한다. 유괴 살인 사건 범인이라는 누명으로 13년을 복역한 금자는 출소하는 날 두부를 들고 찾아온 목사에게 “너나 잘하세요!”라고 일갈한다. 금자의 이 한마디는 가식과 위선이 난무하는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묘한 무기가 되었다.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는 이영애의 연기 지평을 열어준 캐릭터로 각인됐다.
이후 이영애는 <사임당, 빛의 일기>로 예술가로서의 입지를 강화하려고 했지만 다채로운 연기력을 보여줄 수 있는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그래서 이영애 속에 오랫동안 숨어 있던 ‘구경이’의 등장은 이런 목마름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전직 경찰 출신의 구경이는 남편의 자살 이후 불안장애를 겪으면서 술과 게임에 빠져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여고 교사인 남편이 제자와 불미스러운 관계를 맺었다는 소문의 진위를 직접 수사하던 중에, 남편이 목숨을 끊은 이후 극단적 사회 기피자가 됐다. 코믹 탐정극을 표방한 <구경이>의 주인공 구경이는 언뜻 우아하고 세련된 이미지의 이영애와 어울리지 않는다. 음습한 방에서 파리가 달라붙을 정도로 지저분하게 풀어헤쳐진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며 게임에 집중하는 구경이에게서 이영애의 평소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구경이>는 사고사와 자연사 그리고 자살로 위장된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을 잡으려는 보험조사원과 “죽어 마땅한 죄를 저지른 나쁜 사람들”을 처벌하는 송이경(김혜준)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다. 술과 게임에 빠져 지내다가 간혹 돈이 필요할 때 용병처럼 보험조사원으로 투입되어 실적을 올리던 구경이는 보험 사기 사건을 조사하면서 남편의 자살과 관련된 졸업생 송이경의 흔적을 발견한다. 폐인처럼 지내던 구경이의 연쇄 살인범에 대한 수사 본능이 깨어나는 순간이다.
구경이는 천연덕스럽게 경상도 사투리를 구사하면서 수사 단서를 수집하고, 게임 팀원의 자살 시도를 저지하려고 옥상에서 몸을 던져 쓰레기 수거 차량에 떨어지는가 하면, 사건 현장의 사소한 단서 하나로 사건의 전모를 추리할 정도로 뛰어난 수사 능력을 자랑한다. 게다가 목표물이 시야에 들어오면 한달음에 달려갈 정도로 체력 또한 뛰어나다. 천방지축 동분서주하면서 연쇄 살인 사건의 단서를 추적하는 장면들은 블랙코미디의 씁쓸한 웃음을 유발할 정도로 흥미롭다. 문제는 남편의 죽음에 대한 아내로서의 죄책감이었다. 용병으로 투입된 보험조사원과의 일치도가 현저하게 떨어지기 때문이다.
술과 게임에 중독된 폐인의 외모와 살인 사건의 실체를 수사하는 보험조사원의 언행, 그리고 남편의 자살로 스스로를 유폐시킨 전직 경찰의 정신적 외상을 고루 갖춘 구경이는 연기 변신을 시도하는 배우 입장에서 대단히 매력적인 캐릭터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여준 이영애의 캐릭터 중에서 가장 난해한 만큼, 아직은 100% 빠져들지 못한 느낌은 있다. 전직 경찰로서의 상처와 현직 보험조사원으로서의 말과 행동이 길항하면서 분열을 일으킨다. 어쩌면 이영애는 <친절한 금자씨>의 금자 캐릭터를 만들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의도만큼 성공적이진 않은 듯하다. 이영애가 구경이 캐릭터를 어떻게 완성하는지는 끝까지 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저조한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구경이>가 공권력의 사각지대에 놓인 범죄를 사적으로 응징하면서 색다른 재미들을 지뢰처럼 숨겨놓은 매력적인 드라마라는 점이 다행스럽다.
윤석진|대중문화평론가·충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