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회랑에 세워진 알베르티 조각상. 위키피디아
“그는 매우 다재다능한 정신의 소유자였다. 가치 있는 기술 가운데 그가 통달하지 못한 그 어떤 분야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1430년대 후반 3인칭 서술자의 시점으로 쓴 자서전에서, 알베르티는 이렇듯 자부심 넘치게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문학은 물론이고 음악과 조형예술, 심지어 마장술과 군사 분야에까지 능통했던 다재다능한 인물로 포장했던 셈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알베르티의 이미지는 소위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회자되며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이 자전적 기록에 환호했던 부르크하르트가 그를 모든 문화적 요소에 통달했던 ‘만능인’(uomo universale)으로 손꼽았던 탓이다. 19세기의 이 스위스 역사가에게 15세기 이탈리아는 중세의 집단주의적 미몽에서 벗어난 주체적이고 천재적인 인간의 시대였고 알베르티는 단연 그 선두주자였다.
만물박사 혹은 카멜레온 같던 만능인
흥미롭게도 그와 같은 알베르티에 대한 평가는 당대 이탈리아인 사이에서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이와 관련하여 그와 가까웠던 피렌체의 신플라톤주의 학자 란디노가 “알베르티를 어디에 위치시켜야 하는가? 그는 과연 어떤 지식인의 범주에 속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진 바 있기 때문이다. 물론 란디노의 이 질문은 알베르티가 예술과 문학은 물론이고 자연의 수학적 질서에 천착한 기하학과 점성술, 그리고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던, 말 그대로의 만물박사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에두른 표현이었다. 그런데 이 상투적인 상찬보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알베르티에 대해 내린 마지막 평가가 아닐 수 없다. 알베르티가 시대가 요구하던 다양한 맥락에 맞추어 개인적인 문제를 성찰하고 이를 바탕으로 끝없이 자신의 색깔을 바꾸었던 “카멜레온” 같은 인물이라는 흥미로운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알베르티는 조화와 균형을 중시한 고전 고대의 미의 관념을 되살려 회화와 건축 등 르네상스 조형예술에 수학적 원리와 보편적 기준을 적용한 미술가 혹은 미술이론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 곳곳의 여러 도시에서 그가 남긴 예술적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피렌체에서 추방된 망명 가문에서 태어나 평생 이탈리아 전역을 오갔던 방랑 지식인 알베르티에게 그 꽃의 도시는 물론이고 로마와 페라라의 궁정 등에서 우호의 손길을 내밀었기 때문이다. 알베르티 역시 특유의 고전적 감수성과 미적 취향을 녹여낸 여러 자취를 자신이 거쳐 간 도시들 곳곳에 남겨 놓았다.
하지만 대표적인 도덕논고 <가족론>에 잘 나타나듯이, 알베르티는 당대의 어느 누구에게도 결코 뒤지지 않는 뛰어난 고전 학자이자 다산적인 저술가 그리고 시대의 비평가였다. 이를 감안할 때 특히 그가 자신의 실제 경험을 다양한 도덕논고에 의도적으로 녹여냈다는 점은 더욱 눈길을 사로잡는다. 알베르티가 준-자전적 인물들을 문학저술에 등장시키면서 자신과 사회 사이의 긴장, 현실과 이상 사이의 괴리 등을 은연중에 투사하곤 했기 때문이다. 이를 고려하면, 란디노가 묘사한 ‘카멜레온’ 알베르티는 그저 그의 다재다능함이나 천재적인 면모만을 뜻하는 것으로 보기 힘들다. 중세와 달리 더욱 복잡해진 르네상스라는 환경 속에서, 외부 세계와 조응하고 타협하는 새로운 인간의 모습이 그 속에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알베르티는 어쩌면 위선적이고 비도덕적으로 비춰질 수도 있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럼없이 드러낸다. 다른 이들의 비판을 피하기 위해, 심지어 아주 사소한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조차 온갖 주의를 기울였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여기에는 인간 사회에는 누군가의 삶을 망쳐놓기 위해 언제나 눈을 부릅뜨고 있는 모략가들이 들끓고 있으며, 어느 누구도 그들의 시선을 피할 수 없다는 냉철한 현실인식이 흐르고 있다. 또한 바로 그런 맥락에서 알베르티는 마치 수수께끼 같은 말을 덧붙인다. 자신은 언제나 “삶의 모든 면에서, 몸짓 하나하나에서, 모든 말에서 선한 의지를 가진 선한 사람이 되기를, 또 그렇게 보이기를 원했다”고.
의미심장하게도 여기에서 그가 강조한 것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가 아니라 다른 이들의 눈에 자신의 행동을 ‘어떻게 보이도록 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자신을 평가하는 외부 시선에 대한 날카로운 성찰이, 그의 행동을 결정하는 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징표다. 아마도 그가 적절함이나 방정함 또는 우아함 등으로 옮길 수 있는 고전문학의 이상 ‘데코룸’(decorum)을 단순한 문학이나 예술의 규범을 넘어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지켜야 할 균형과 중용이라는 행위규범의 이상으로 평생 강조한 것도 그와 무관하지 않다.
17세기 초반 제작된 알베르티의 초상화. 위키미디어 코먼스
‘사회적 인간’에게 진짜 필요한 것
게다가 이런 그의 생각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성찰에도 여실히 드러난다. 여타의 르네상스인들처럼 알베르티는 인간을 지성과 이성을 보유한 영예로운 존재로 예찬했다. 하지만 그에게 인간의 존엄성은 어느 누구에게나 동등하게 주어지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완성되고 학문과 기민함을 통해 연마되고 정제되면서” 비로소 고양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인간의 명예를 공적인 차원에서 새롭게 평가한 이유이다. 알베르티에게 인간의 명예는 결코 개인적인 고독이나 여가가 아니라 “광장에서 생겨나는” 것이고, 인간의 덕은 “업적을 통해 드러나지 않으면 인식될 수 없는” 공적인 것이었다.
그렇다면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덕이나 부가 아니라 내가 이름 붙이지 못한 어떤 것, 다시 말해 다른 사람들을 매료시키거나 누군가를 다른 이들로부터 더욱 사랑받도록 만드는 어떤 것이다. 이것은 한 인간의 얼굴 속에, 눈 속에, 행동방식에, 그리고 외양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 그에게 어떤 우아함과 정숙한 아름다움을 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결코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인식이 가져온 고뇌가, 고전적 이상에 충실했던 르네상스인과 만나면서 명명하기 어려운 인간의 행위규범으로 갈무리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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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병철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_ 르네상스는 말과 글을 통해 고대 세계를 부활시키려던 지적 운동이었다. 14세기 이후 백가쟁명의 지성사를 검토하는 ‘르네상스와의 대화’로 인간과 사회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