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후 두번째 게임이 시작됩니다. 참가자들은 진행요원의 안내에 따라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초록색 단체복을 입은 참가자들이 인간의 감정을 느끼기 어려운 안내 방송에 따라 질서 정연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들의 목표는 단 하나,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456억원을 차지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즐겼던 각종 놀이가 참가자들의 목숨을 좌지우지하는 생존 게임으로 전유된 현장은 죽음의 공포와 상금을 차지하고 싶은 탐욕이 충돌하는 아수라장이다. 게임에서 탈락한 참가자들은 목숨값 1억원의 화폐로 교환되어 돼지저금통에 안치된다. 게임 탈락은 어린 시절 놀이에서처럼 더 이상 참가할 수 없다는 상징적 선언이 아니라, 진짜 죽음을 의미했다.
“애들 놀이를 시켜놓고 사람을 죽이”는, <세상에 이런 일이>에도 나오지 않을 생존 게임에 참가할 사람들이 누가 있을까 싶지만, 목숨 걸고 달려들어야 하는 절박한 처지의 사람들이 적지 않다. 예를 들면, 사채업자에게 빚 독촉을 받다가 신체 포기 각서까지 써야 하는 경제적 약자들이 그렇다. 돈 때문에 죽음까지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딱지치기’ 같은 놀이 몇번으로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제안은 거절하기 쉽지 않은 유혹이다.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 같지만, 자본이 인간을 압도하는 현실에서는 어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이처럼 <오징어 게임>은 수백억원의 상금이 걸린 생존 게임을 매개로 자본주의의 무한 생존 경쟁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참혹한 현실을 우화적으로 풍자한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가족과의 행복을 꿈꾸었던 성기훈(이정재)은 경제적 약자로 전락한 인물이다. 그는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자동차 회사에 취직하여 성실하게 일했지만, 경영진의 무능에서 비롯한 구조조정 여파로 희망퇴직을 하면서 인생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딸과 아내를 부양하기 위해 치킨집에 이어 분식집을 열었지만 모두 실패했고, 결국은 아내와 이혼하면서 아이 양육권마저 넘겨주었다. 돈이 원수였다. 늙은 어머니가 성치 않은 몸으로 번 돈마저 도박으로 탕진하고 사채업자에게 시달리던 상황에서 게임 제안을 받았다. 애들 놀이에 거액의 상금이 걸려 있다는 제안에 황당해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참가 신청을 했다.
그러나 456명의 참가자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게임이 어린 시절 친구들과 즐겼던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라는 것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규칙을 어긴 참가자들이 탈락과 동시에 사살되는 현장을 목격하면서 그는 자신이 아비규환의 생지옥에 들어왔음을 깨닫는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게임에 참가했는데, 게임장은 또 다른 지옥이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로 시작한 게임이 ‘설탕 뽑기’(달고나), ‘줄다리기’, ‘구슬치기’, ‘징검다리 건너기’를 거쳐 ‘오징어게임’ 으로 이어지는 동안 수많은 참가자가 죽었고, 돼지저금통에는 그만큼 거액의 현금이 쌓였다 .
정해진 규칙에 따라 죽고 살기를 반복해도 마냥 재미있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낭만적인 놀이가 살해 도구로 전유된 게임장에서 성기훈은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쳤다. 술래 인형의 눈을 피해 혼신의 힘으로 달렸고, 우산이 새겨진 달고나 뽑기에는 간절한 심정으로 침을 묻혔다. 그리고 구슬을 공유하는 동지 관계를 맺은 노인을 속이면서 마침내 최종 승자를 가리는 오징어 게임까지 살아남았다.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한 게임에 참가하면서 그는 돈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최후의 승자가 되어 456억원의 상금을 받았지만 행복하지 않았고, 오히려 회한에 잠겼다. 456명의 참가자 중에서 마지막 번호인 456번으로 불렸지만, 성기훈은 항상 중간지대로 숨고 싶어 했다. 그의 번호가 1부터 9까지를 3등분했을 때의 가운데 숫자인 ‘456’이었던 것도 우연만은 아니다. 한국에서의 게임을 가장 흥미롭게 관전하고 있는 전세계 브이아이피(VIP)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성기훈은 “두려움을 느낄 땐 무리들 가운데로 숨고 싶은” 동물의 본성에 충실한 ‘경주마’일 뿐이다.
‘오징어 게임’에 참가할 일은 절대 없으리라 확신하는 사람들일수록 자본이 설계한 게임의 경주마일 가능성이 높다. 게임에서 탈락하지 않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기훈에게서 어렴풋이나마 자신의 모습을 본 사람들일수록 그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한다. 비록 자본에 포획되어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에 상처를 입은 채 살아간다 해도 결코 성기훈처럼 밑바닥까지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이다. 그러나 한국적 상황과 거리를 두고 있는 외국인들에게 ‘오징어 게임’은 흥미로운 관전 대상일 뿐이다. 외국인 관전자들이 오염된 자본주의 생태계 최고 포식자가 설계한 게임의 경주마가 될지도 모른다는 한국인의 공포 심리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나만 아니면 경주마가 누구든 무슨 상관이냐는 이기심을 버리고 “난 말이 아니야! 사람이야!”라는 성기훈의 경고를 새겨듣는다면, 훼손된 공동체 의식이 조금이라도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윤석진 대중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