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의 고의 중과실에 의한 허위 조작 보도에 대해 최대 5배 손해배상 청구를 규정한 ‘언론중재법’ 개정을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흥미로운 점은 학계와 언론계의 반대에도 언론 소비자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언론 소비자들의 상당수가 기자와 쓰레기를 합성한 ‘기레기’라는 모욕적인 표현을 유행어처럼 사용하고 있는 현실이 반영된 결과이리라.
한국 언론의 참담한 민낯은 정의롭고 양심적인 언론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드라마들의 저조한 시청률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시청자들은 언론 소재 드라마들이 권력과 자본을 감시하는 사회적 공기로서 언론의 책무를 강조할수록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여기며 외면했다. “신뢰받는 냉철한 언론인”의 몰락을 다룬 <더 로드: 1의 비극> 또한 다르지 않다.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 백수현(지진희)은 오랫동안 탐사 취재한 정경유착 보도를 앞두고 있다. 그러나 내부고발자가 자신의 침묵 때문에 중학생 실종 사망 사건의 범인으로 억울하게 수감 생활을 했던 어린 시절 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그는 결정적 물증을 확보하기는커녕, 죄책감으로 점철된 과거의 악몽과 마주하게 된다.
애써 지워버리고 싶었던 기억이 소환되기 전까지 백수현은 가정에서는 자상한 남편이자 아버지였고, 직장에서는 동료들의 신망이 두터운 기자이자 앵커였다. 그러나 실상은 보이는 것과 달랐다
. 중학생 납치 살해 사건의 진범이었던 아버지로부터 어머니와 친구를 구하기 위해 침묵하고 시신을 유기했던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는 결국 잘못을 바로잡았다고 항변하지만, 그것은 자기합리화일 뿐이었다. 언론인으로서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해 보이는 그의 태도는 어린 시절 자신의 인생을 결정해버린 비극적 사건에 대한 죄책감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언론 소비자의 신뢰를 한몸에 받고 있던 백수현은 제강그룹 회장이자 장인 서기태(천호진)의 비자금 의혹을 취재하면서 나락으로 떨어진다. 비자금 출납기록 원본을 확보하기 위한 취재 과정에서 언론사 후배 차서영(김혜은)과의 외도로 태어난 아들이 유괴되어 살해당하고, 이를 계기로 언론인으로서의 냉철한 태도에 가려져 있던 백수현의 불안한 내면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유괴 사건의 진범을 추적하면서 자신의 침묵으로 은폐된 과거의 진실과 대면할 수밖에 없었던 그는 자신을 “가면으로 위장한 이기주의자, 신념을 갑옷처럼 입은 위선자”로 규정하면서 무너져 내렸다.
진실만을 보도하겠다는 신념은 유괴 사건의 진범을 추적하는 과정에서 확증편향에 가까운 자기 확신으로 변질되었다. 선배의 명성에 가려 좀처럼 존재감을 인정받지 못하던 차서영과 청와대 대변인으로 정계 진출을 노리던 권여진(백지원)의 먹잇감이 되어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진실 보도라는 신념의 왜곡과 언론인으로서의 사명감이 과잉되면 사회적 공기로서 언론의 역할은 제대로 발휘되기 어렵다. 침묵으로 진실을 은폐했던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백수현의 몰락은 사적 영역에서 공적 기능을 담당하는 언론의 이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유괴되어 살해당한 아들의 어머니에 대한 여론의 동정표를 이용해 앵커로서의 전성기를 되찾고 싶은 차서영, 정경유착의 연결고리 역할을 자처한 권여진 또한 별반 다르지 않다. 이들은 언론계가 다른 직종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도 높은 윤리의식을 강제하고 있음에도 ‘기레기’라는 모욕적인 표현에서 벗어나지 못한, 오염된 언론 현실을 방증하는 존재들이다.
권력과 자본에 대한 언론의 비판과 감시가 자유롭지 못하면 사회가 병들고 권력형 부정부패가 난무한다. ‘언론중재법’에서 규정한 징벌적 손해배상이 비판과 감시 기능을 무력화시키고, 언론의 자유를 침해할 것이라는 우려가 끊이지 않는 것도 그래서이다. 자유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른다. 미국과 달리 정치적 중립성을 제도적으로 강제하고 있음에도 한국 언론은 정치적 편향성을 공공연하게 드러낸다. 자유에 따르는 책임은 방기하고 정치적 이해관계와 자본의 이익 추구에 함몰되어 ‘뉴스 장사’를 일삼는 식의 침소봉대와 견강부회의 보도 관행은 언론의 침묵보다 더 심각한 폐해를 유발한다. 이러한 보도 관행을 타파하지 않는다면, 언론 자유에 대한 언론계의 주장은 공허한 메아리로 그칠지도 모른다.
대중문화평론가·충남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