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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세상을 노래한 시인, 불의를 참지 않은 실천가 정태춘

등록 2021-08-16 04:59수정 2021-08-16 08:13

음악다큐 ‘아치의 노래, 정태춘’
제천국제음악영화제서 첫 공개
음악 다큐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스틸컷.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공
음악 다큐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스틸컷.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공

가수 정태춘이 데뷔한 지 40여년이 흘렀어도 그가 여전히 우리 시대의 상징이라는 점을 부인할 순 없다. 음악적 성취에서, 문학으로 불릴 만한 시적 가사에서, 음반 사전심의제도 철폐 등 사회적 실천과 참여에서, 그를 앞설 뮤지션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그는 ‘가수들의 가수’였고 ‘작가들의 작가’였다. 누군가는 그를 한국 대중음악에 지워질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가수로 떠올리기에 앞서, 세계의 비참과 불의를 못 견뎌 한 자유인으로 떠올릴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삶을 기록한 영화가 나온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지난 13일 제천국제음악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고영재 감독의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그의 노래 인생 40여년을 갈무리한 다큐멘터리다. 촉망받는 가수에서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고스란히 담았다. 음악영화답게 정태춘의 노래 28곡을 배경으로 독보적인 작품세계와 비타협적인 사회 참여의 길을 함께 걸어온 완고한 예술가의 초상을 그려냈다. 1989년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합법화 투쟁부터 2006년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 운동, 2016년 광화문 촛불집회까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 늘 함께했던 실천적 지식인의 면모도 빠짐없이 기록했다.

음악 다큐 영화 &lt;아치의 노래, 정태춘&gt; 스틸컷.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공
음악 다큐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스틸컷.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공

“제가 음악평론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곡을 선정할지부터 고민스러웠어요. 몇달 동안 노래를 매일 듣고 다녔는데 제 기준과 정서대로 하는 게 맞는지 자신이 없었죠. 정태춘·박은옥 팬들이 어떻게 보실지 긴장됩니다. 만약 마음에 안 든다면 온전히 제 탓이죠.” 지난 14일 <한겨레>와 전화로 한 인터뷰에서 고 감독은 두려움부터 피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 유명 감독들에게 연출을 제안했을 때 거듭됐던 거절의 이유가 “잘 만들어야 본전이고 못 만들면 욕먹을 게 분명하다”는 것이었다.

감독도 정하지 못한 사이 2018년 말부터 기념사업이 진행되자, 다큐 <우리 학교>(2006)와 300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은 화제의 다큐 <워낭소리>(2008) 프로듀서 출신의 고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우선 기록에 나섰다. “다큐를 찍자는 의도도 있었지만 이참에 정태춘의 활동을 기록하자는 아카이빙 목적도 있었거든요. 그러던 중 태춘이 형이 ‘그냥 니가 연출해도 되잖아. 왜 멀리서 찾아’라고 해서 얼떨결에 첫 장편 연출을 맡게 됐죠.” 정태춘·박은옥 데뷔 40돌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아니라 고 감독이 운영하는 독립영화제작사 인디플러그가 제작에 나선 배경이다.

음악 다큐 영화 &lt;아치의 노래, 정태춘&gt; 스틸컷.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공
음악 다큐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스틸컷.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공

영화는 정태춘·박은옥 부부를 잘 아는 이도, 잘 모르는 이도 충분히 즐길 만하다. 여기에 최초 공개되는 희귀 음원과 영상은 팬들에게 선물로 다가갈 터. “정태춘의 음악 전반부만 아는 이들, 후반부를 주로 아는 이들 모두에게 이것이 정태춘이라고 알려주고 싶었어요.”

뮤지션 정태춘 말고 인간 정태춘은 어떤 사람일까? 고 감독은 다음과 같은 일화를 들려줬다. “동사해 숨진 서울역 노숙자 추모행사가 2018년 겨울에 있었어요. 대개 가수들은 노래만 하고 가는데, 형은 지하도 행진 퍼포먼스까지 함께하더라고요. 행사가 마무리될 무렵 형이 갑자기 활동가 한분에게 본인이 입고 있던 롱패딩을 벗어주는 거예요. 왜 그랬냐고 물었더니 ‘그냥 그러고 싶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런 사람이에요.”

음악 다큐 영화 &lt;아치의 노래, 정태춘&gt; 스틸컷.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공
음악 다큐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스틸컷.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공

정태춘을 알고 지낸 지 16년이 되었지만, 원래는 가끔 안부만 주고받는 사이였다던 그는 “‘우리들의 죽음’이라는 노래를 들었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했다”고 했다. “제가 69년생인데 원래 ‘촛불’이나 ‘사랑하는 이에게’ 정도만 알고 있었거든요. 근데 ‘우리들의 죽음’을 듣고 ‘한국에도 이런 가수가 있었어?’ 하고 놀랐죠.” 맞벌이 부부의 아이들이 부모가 출근한 사이 잠긴 방 안에서 불장난을 하다 숨진 비극을 다룬 이 곡은, 1990년대 초 한국 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아프게 고발한 노래다.

영화 제목에 들어간 ‘아치의 노래’는 정태춘·박은옥 10집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에 수록된 곡으로, 정태춘이 기르는 새에 빗대 자신의 음악인생을 자조적으로 써 내려간 노래다. “그 노래가 태춘이 형의 삶을 대변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영화 제목을 ‘아치의 노래’로 하겠다고 했더니 형이 ‘사람들이 잘 모를 수 있으니 제목에 정태춘을 넣자 해 지금 제목이 됐죠. 주변 20대들에게 영화를 보여줬더니 ‘아치의 노래’에 나오는 랩이 처음 들어보는 거라며 ‘장난 아니다’라고 하더라고요. 지금 젊은 세대들에게도 정태춘의 노래가 통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클래식(고전)은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법이니.

음악 다큐 영화 &lt;아치의 노래, 정태춘&gt; 스틸컷.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공
음악 다큐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스틸컷.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제공

지난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장편제작지원작에 선정된 이 영화는 올해 이 영화제 한국경쟁 부문에 출품됐다. 영화음악가이기도 한 조성우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개인적으로 중고등학교 때 기타를 치면서 ‘시인의 마을’이나 ‘떠나가는 배’ 등을 많이 불렀을 만큼 오랜 팬이었다”며 “지원작으로 선정된 사실을 알고 반가웠다”고 했다. 영화제 부대행사로 16일 저녁 7시 제천문화회관에서 ‘세상을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는 이름으로 정태춘·박은옥 콘서트도 펼쳐진다.

정작 정태춘은 영화를 어떻게 봤을까? 언론 인터뷰를 비롯해 공개적인 자리에 좀처럼 응하지 않는 그는 13일 영화 첫 상영 뒤 이뤄진 관객과의 대화에 참석했다. 영화를 본 소감을 묻는 질문에 그는 “영화를 본 건 내부 시사 이후 두번째다. 영화가 좀 길다 싶다”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관객들도 똑같이 길다고 느꼈을지 모르겠다”며 “제작진이 오랫동안 애쓴 결과로 극장 상영까지 하게 됐다”고 했다. 또 그는 “영화 보면서 여러 감정들이 들기는 했다. 저 자신을 보면서 스스로 ‘저 사람이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어떤 분들에게 어떤 자극이나 정서적 도움, 영감 같은 것들을 줄 수 있었을까’ 되묻게 됐다. 아주 작게라도 누군가에게 그런 것들을 줄 수 있었다면 감사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계획이 없다”며 시장이 완전히 지배한 음반시장에서 더 이상의 음악활동을 하지 않겠다는 평소 입장을 재확인했다. “시장이 제 음악을 본전치기라도 하게 해줄까. 회의적이죠. 그래서 접은 거죠. 우리들의 문명과 상상력에 대해 제가 갖고 있는 세계관으로 세상과 교감할 수 있을까. 그건 좀 어렵다고 봅니다.”

고영재 감독이 &lt;아치의 노래, 정태춘&gt; 촬영 현장에서 웃고 있다. 인디플러그 제공
고영재 감독이 <아치의 노래, 정태춘> 촬영 현장에서 웃고 있다. 인디플러그 제공

데뷔 50돌 때는 정태춘의 새 앨범을 들을 수 있을까. 관객과의 대화 말미에 고 감독은 “영화 좋게 보셨으면 소문 내주셨으면 한다. 그 흥행에 힘입어 아티스트 정태춘이 70대에 만든 창작곡을 듣는 게 제 소망”이라고 했다. 영화제에서 두차례 상영된 <아치의 노래, 정태춘>은 내년 초 정식 개봉될 예정이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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