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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경쟁자 실력도 시원하게 인정할 줄 아는 아이들

등록 2021-07-02 20:56수정 2021-07-03 02:02

윤석진의 캐릭터 세상 _ 라켓소년단

전국소년체육대회 출전을 목표로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하다가도 틈날 때마다 게임에 열중하는 청소년들의 발랄한 모습이 저절로 ‘아빠 미소’를 짓게 만든다. 초록 물결 넘실대는 땅끝마을 해남에서 1시간마다 오는 버스를 타고 통학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으로 참새처럼 쉴 새 없이 떠드는 중학생들 덕분에 잠시나마 번잡스러운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어 고맙기까지 하다. 그러나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상당수의 청소년이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른 채 집과 학교 그리고 학원의 트라이앵글에 갇혀 성적 경쟁을 벌이는 삭막한 현실 때문이다. ‘방탄소년단’을 따라 ‘라켓소년단’이라 이름 짓고, 기분 좋을 때마다 엄지를 치켜세우며 깔깔거리는 청소년들의 모습이 다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것도 그래서이다.

<라켓소년단>(에스비에스)의 주인공들은 해남서중 배드민턴부 선수들이다. 전국 소년체전 8연패의 영광은 이미 오래전에 전설이 되었고, 지금은 선수가 부족해서 단체전 대회 출전 자체가 어려울 정도로 해체 위기에 몰려 있지만, 배드민턴에 대한 이들의 열정만큼은 국가대표급이다. 뛰어난 실력에 조각 같은 외모를 겸비한 주장 방윤담(손상연), 타고난 공감 능력으로 티격태격하는 부원들의 다툼을 중재하지만 군인 아버지 앞에서는 말 한마디 제대로 못 하고 위축되는 나우찬(최현욱), 배드민턴에 대한 모든 것을 꿰뚫고 있으면서 이용대 선수를 선망하는 이용태(김강훈)는 함께 운동하던 부원이 서울로 전학 가는 바람에 의기소침해 있다가 윤해강(탕준상)이 합류하면서 활기를 되찾는다. 여기에 군의회 의장 아들로 전국 상위권 성적의 전교 1등을 자랑하는 정인솔(김민기)까지 배드민턴부에 들어오면서 “이겨도 같이! 져도 같이!”를 외치는 라켓소년단의 진용이 완성된다.

라켓소년단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내는 청소년들이다. 학부모의 관점으로는 가장 위험한 시기라고 할 수 있지만, 사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시속 300㎞가 넘는 강력한 스매시부터 시속 0㎞에 가까운 헤어핀까지 라켓을 떠난 셔틀콕이 매번 다른 속도와 방향으로 네트를 넘어가는 것처럼 어디로 튈지 알 수 없어도 10대만의 방식으로 친구를 만들고 우정을 쌓아가면서 2차 사회화 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부원들보다 한 학년 아래인 이용태가 자상하게 자기를 챙겨주는 나우찬이 경쟁자라는 코치 말에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면서 울먹이는 모습이나 학교 폭력을 당한 이용태를 대신하여 윤해강이 복수에 나서는 행동은 이들이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면서 친구 관계를 맺고 있는지 잘 보여준다.

그러나 윤해강이 처음부터 부원들을 친구로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국가대표 출신 코치인 아버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서울에서 해남으로 이사 와서 배드민턴 라켓을 잡았지만, “나야! 나 윤해강이야, 이것들아!”라고 허세를 부리며 다른 부원들과 티격태격한다. 우리가 선택했으니 열심히 해야 할 의무도 조금은 있다는 방윤담의 말을 재수 없다고 받아치면서 “누구한테 배웠냐?”고 비아냥거리기도 했지만, 천식 때문에 고생하는 어린 동생을 부원들이 번갈아 업어가면서 병원 응급실에 데려간 것을 알게 된 윤해강은 뒤늦게 친구라는 존재의 중요성을 깨닫는다. 서로를 경쟁자로 생각하면서도 상대방의 실력을 인정할 줄 아는 라켓소년단은 친구와의 경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강박증에 사로잡혀 공부에만 매달리느라 우정을 쌓을 겨를조차 없는 청소년들의 억압적 현실을 역설한다.

감독과 코치를 포함한 해남서중 배드민턴부의 목표는 전국소년체육대회 출전이지만, 라켓소년단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들은 대회 출전과 승리보다 같이 운동하고 게임을 하면서 놀 수 있는 친구와의 관계를 중시한다. 윤해강이 경기 도중 셔틀콕에 눈을 맞아 생긴 부상 때문에 운동을 쉬어야 하니 연락하지 말라는 코치의 말에 놀란 부원들이 친구를 걱정하면서도 보고 싶은 마음을 참지 못하고 찾아간 것도 그래서이다. 이처럼 아버지로서 자식의 앞날을 생각하는 코치의 걱정과 달리, 라켓소년단의 구성원들은 배드민턴을 통해 서로에게 위로와 용기를 북돋는 좋은 친구 관계를 맺어나간다.

아들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배드민턴을 시작한 것이 아닌지 걱정하는 아버지에게 윤해강은 어른들의 생각이 모두 정답은 아니어도 정답에 가깝다는 건 알고 있지만, 선택은 자신이 하고 싶다는 생각을 당당하게 밝힌다. 윤해강이 대변하고 있듯이, 어른들의 눈에는 미성숙한 아이들로 보이겠지만, 라켓소년단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친구 관계를 중시하는 것은 물론, 어른을 존중하고 공경할 줄 아는 청소년들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처럼 경쟁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처럼 다투는 삭막한 현실에서 이들의 존재감이 빛을 발하는 까닭이다. 시속 300㎞의 스매시나 0㎞의 헤어핀 모두 네트를 넘어 상대방의 진영 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모두 득점으로 인정된다. 그러나 세상은 모든 청소년에게 시속 300㎞의 스매시로 공부할 것을 요구한다. 공부하지 않으면 세상의 낙오자가 된다는 기우 때문에 자식들의 미래를 직접 설계해 실행에 옮기는 학부모들의 시선에 라켓소년단이 어떻게 보일지 자못 궁금하다.

윤석진 충남대 교수·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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