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
⑥조숙한 역사주의자, 포조 브라촐리니
⑥조숙한 역사주의자, 포조 브라촐리니
포조가 1447년 쓴 도덕논고 <운명의 가변성에 관하여>의 15세기 필사본에 삽화로 표현된 그의 초상. 바티칸 도서관 소장, 위키데이터.
당위를 넘어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주목한 새로운 인물 1428년 늦가을 지천명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포조는 오랜 친구 니콜리에게 편지 한통을 보냈다. 교황청 비서라는 격무 속에서도 그는, 시간이 허락하는 한, 젊은 시절 그랬듯이 고대의 흔적들을 찾아다니며 크고 작은 유물이나 문헌 등을 수집하고 필사하는 답사 여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번 경우 그의 목적은 로마 근교의 한 성곽을 찾아 그곳에 남아 있던 고대의 명각을 확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무너진 성곽을 오르던 도중 우연히 젊은 여성들을 만나 그들의 응원을 받는 ‘즐거운’ 경험을 하게 되었고, 예기치 못한 그들과의 가벼운 술자리로 하루를 마감했다. 니콜리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고, 예의 그렇듯이 완벽주의자 니콜리가 나이와 지위에 걸맞지 못한 부도덕한 행실이라고 아마도 그를 차갑게 책망했던 듯하다. 포조의 편지는 어쩌면 소소한 일상에 불과할 수도 있는 이 경험에 대한 일종의 자기변호였다. 언제나 진지할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을 고매한 도덕 기준에 맞추어 평가하는 니콜리에게 자신은 그와 다르다는 항변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니콜리에게 할 수만 있다면 “뿔 달린 버펄로나 야생 황소”가 아니라 “예쁘장한 외모의 어린 소녀들”과 시간을 보내며 그들 곁에서 고대의 “명문들을 옮겨 적고” 싶다는 솔직한 속내를 풀어놓았다. 15세기를 풍미했던 지식인 가운데 포조만큼 다양한 평가를 받고 있는 인물도 흔치 않다. 일견 가벼운 일상에 관한 두 친구의 서로 다른 생각을 전하고 있는 이 편지는 이런 그의 삶을 이해하는 흥미로운 창이라고 해도 손색없어 보인다. 포조는 1380년 아레초 근교의 작은 마을 테라누오바에서 태어났다. 10대 후반 청운에 뜻을 두고 피렌체로 왔을 때 그가 자랑할 수 있는 것은 뛰어난 손글씨 실력 하나뿐이었고, 그의 주머니에는 단돈 몇푼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아름다운 필체는 곧 살루타티의 눈에 들었고, 이내 그는 그 피렌체 서기장의 후원 아래 휴머니스트 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가 당대 가장 유명한 ‘책 사냥꾼’이자 전투적인 고전주의자로 성장하는 계기였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다양한 도덕논고 등을 저술해 적지 않은 풍파를 일으킨 당대 최고의 논쟁꾼이자 성마른 지식인이었다. 아무튼 오늘날 그가 태어난 고향이 그의 이름을 따 ‘테라누오바브라촐리니’로 개명될 정도로 포조는 15세기 전반 최고의 유명 인사 가운데 하나였다. _바덴에서 목격한 자유로운 성 관념 1428년 편지는 10여년 전인 1416년 그가 니콜리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의 후속편처럼 보인다. 15세기 초반의 유럽 세계는 오늘날만큼이나 격동의 연속이었다. 특히 세속권력과의 힘겨루기 속에서 둘 혹은 셋의 교황이 난립하면서, 중세 유럽의 정신적 질서를 지배하던 보편교회의 이상이 허물어졌다. 1414년 개최된 콘스탄츠 공의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집된 최대의 종교회의였다. 종교계는 물론이고 유럽 곳곳의 크고 작은 정치계 인사들이 남독일의 이 작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포조는 로마 교황청의 핵심 인사로 거기에 참석했다. 하지만 회기 초 자신이 섬기던 교황이 폐위되면서 앞으로 그의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될 어두운 그림자가 포조 앞에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그에게 ‘책 사냥꾼’이라는 불후의 명성을 안겨준 여러 여행이 바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는 점은 흥미롭기 그지없다. 힘겹고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도 그가 독일과 스위스 등지의 오래된 수도원에 잠들어 있던 희귀한 고서들을 발굴했기 때문이다. 이런 그에게 1416년 5월 콘스탄츠 근교의 바덴 지역을 방문할 기회가 찾아왔다. 당시 류머티즘으로 고생하던 그에게 주위 사람들이 온천으로 유명한 그 작은 마을을 소개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 머문 며칠 동안 자신이 목격한 바덴 “사람들의 습속”을 마치 오늘날의 여행안내 책자를 기술하듯 사실적이면서도 흥미진진하게 니콜리에게 전했다. 다른 무엇보다 그의 관심을 끈 것은 그곳을 찾는 사람들이 보여준 자유로운 성 관념과 거리낌 없는 성적 관행이었다. 부끄러운 줄 모르고 몸의 은밀한 부분을 보여주는 여성부터 속이 훤히 비치는 옷을 입고 낯선 이들과 성적 농담을 주고받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그곳 사람들의 풍속은 분명 포조의 상식을 넘어섰다. 일면식도 없는 남성들이 던지는 몇 송이의 꽃잎과 약간의 동전을 줍기 위해 그들을 유혹하거나 서로 다투기를 주저하지 않는 여성들의 모습 또한 그저 머릿속에서나 떠올릴 수 있던 놀라운 광경이었다. 게다가 그곳의 남편들은 그런 아내들의 모습에 어떠한 질투나 시기의 감정도 느끼지 않는 듯했다. 그곳의 남녀들은 거의 벌거벗은 채로 목욕탕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거나 하프를 연주하면서 상대방의 은밀한 부분을 보고 만지는 일조차 서슴지 않는다는 게 포조가 니콜리에게 전한 바덴의 모습이었다. _경험주의에서 비롯한 다원적 휴머니즘 바덴 편지는 몇가지 측면에서 휴머니스트 포조의 특징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1428년 편지처럼, 인간 본성에 기초한 자유로운 성적 묘사가 도드라진다. 그에 따르면 그들은 “건강이 아닌 쾌락”을 목적으로 그곳을 찾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모두 “연인이자 구애자이며, 쾌락에 기초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포조에게는 그들의 이런 단순한 삶과 서로에 대한 신뢰가 그저 경탄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며, 그렇기에 그는 전통적인 도덕률에 입각해 바덴 사람들의 습속을 비난하려 하지 않았다. “행복하다면 그렇게 살라”는 고대인들의 가르침에 따라 자기가 소유한 작은 것을 향유하며 살아가는 바덴 사람들을 획일적인 어떤 기준에 따라 재단할 수 없다는 ‘조숙한’ 생각이었다. 포조의 휴머니즘이 한마디로 규정할 수 없는 다원적·절충적 성격을 띠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르네상스기의 휴머니스트들에게 고전은 그들의 생각과 행동을 뒷받침하는 전거이자 모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단 하나의 모델에만 의존하지 않았고, 때론 어느 한 휴머니스트조차 서로 상반된 모델에 따라 세상을 모순되게 바라보곤 했다. 바덴의 풍속을 묘사하면서 포조는, 그들의 낯선 관행이 “모든 것을 공유하는” 플라톤의 공화국, “걱정 없이 삶을 즐기는” 아프로디테의 정원, 본성상 이미 “헬리오가발루스”의 삶을 실천하는 “에피쿠로스”의 세계를 연상시킨다고 표현했다. 때론 일관되지 못하다는 비난에 휩싸이기도 했지만, 이처럼 포조에게 고전은 그저 현재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덧입혀진 ‘헐거운’ 망토였다. 둘째, 휴머니스트로서 포조의 언어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다. 언어와 객관적 실체 사이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은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이 천착했던 중요한 주제였다. 포조 역시 마찬가지다. 후일 그는 당대 최고의 언어학자 발라와 언어 관례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고, 라틴어의 역사와 관련되어 브루니의 ‘이중언어론’을 비판하기도 했다. 무엇이 되었든 그가 견지했던 것은 언어란 곧 실체의 반영이고, 따라서 기계적인 문법이 아니라 그것의 용례에서 올바른 언어 관행이 찾아져야 한다는 경험주의적인 시각이었다. 바덴 편지에서 포조는 그곳 사람들이 자신들의 관습을 함께 즐기자고 권했지만 결코 그럴 수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어떤 도덕적 기준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의 언어를 이해할 수 없어 그 즐거움을 누릴 수 없었을 뿐이라는 솔직하고 담담한 이야기다. _표현할 뿐 평가하려 들지 않는 바덴 편지에 나타나는 이러한 흔적은 이후 그가 저술한 여러 도덕논고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무엇보다 그는 낯선 관습을 그 모습 그대로 표현하려고 할 뿐 어떤 기준에 맞추어 그것들을 평가하려 들지 않았다. 일례로 포조는 ‘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의하면서 다양한 지역이나 문화에 따라 귀족의 의미가 다를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고, 동양에 관한 여행기를 쓰면서 인도인들의 관습을 그 나름의 맥락에서 기술하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이 점이야말로 그를 당대의 다른 휴머니스트들과 구별 짓는 커다란 특징일지 모른다. ‘당위’가 아니라 ‘실제 어떠했는가’라는 시각에서 세상을 바라보려던 설익었지만 조숙한 ‘역사주의자’의 면모가 숨어 있다.
포조가 구입해 만년을 보낸 고향 테라누오바브라촐리니의 빌라. 1440년 그가 쓴 도덕논고 <귀족론>의 가상 대화가 벌어진 공간이기도 하다. 인터넷 스튜디오 아티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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