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백원근의 출판풍향계
1990년대 이래 한국 출판유통의 양대 과제는 도서정가제 정착과 출판유통통합전산망(이하 ‘전산망’)을 포함한 출판유통의 현대화였다. 도서정가제는 우여곡절을 겪으며 정가의 15%에 해당하는 직·간접 할인을 허용하며 불완전하게나마 유지되고 있지만, 전산망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준비중’이라는 공사 간판을 떼지 못하고 있다. 올해 9월부터 본격 운영에 들어간다는 전산망이 작가의 인세 정산에까지 도움을 줄 것처럼 알려지는 등 성급한 기대가 분출하고 있는 점도 우려된다.
지난 5월 초 한 과학소설(SF) 출판사가 장강명 작가와 계약한 책의 계약금 미지급, 인세 보고 누락, 작가와의 오디오북 제작 협의 부재로 출판계약이 파기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작가는 앞으로 전산망에 가입한 출판사와 계약하겠다며 정부의 대책 마련도 요구했다. 이에 화답하듯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13일자로 ‘출판유통의 투명성을 높여 불공정 관행을 개선한다’는 보도자료를 냈다. 책의 유통·판매 현황을 수월하게 파악하고, 작가와 출판사 간 투명한 정산을 위한 기반을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대한출판문화협회는 ‘문화체육관광부의 균형 잡힌 출판 행정을 기대한다’는 성명을 통해, 한 출판사의 예외적 일탈 행위를 ‘관행’으로 매도하는 정부 태도를 비판했다. 장강명 작가는 자신이 당한 일이 예외적 일탈 행위가 아니라며 출판단체를 반박했다. 18일에는 한국출판인회의가 ‘문화체육관광부 보도자료에 대한 한국출판인회의 입장’ 발표를 통해, 정부가 저자와 출판계 사이의 갈등을 부추긴다고 비판했다.
전산망은 만능이 아니다. 출판사들의 협력을 받아 도서 정보의 메타데이터를 입력하고, 유통사(판매 서점)의 협력으로 판매 정보를 입력해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다. 전국 서점이나 도서관 등에서 이루어지는 중복적인 도서정보 입력이 사라지고, 독자들에게는 다양한 검색어로 책 구매 과정에서 ‘발견성’을 높여준다. 무엇보다 각종 판매 데이터를 출판시장 관계자들이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그런데 해외의 대표적인 출판유통 전산망 사례인 캐나다의 북넷캐나다, 독일의 엠파우베(MVB), 일본의 출판인프라센터, 프랑스의 크릴 등 어디에서도 판매량을 줄세워 베스트셀러 목록을 발표하거나 집계된 판매량에 기반해 저자 인세 지급 용도로 쓰는 사례는 없다. 판매 데이터를 낱권 단위로 제3자에게 공표하지도 않는다. 세계적인 판매망을 가진 아마존은 전산망에 가입하지도 않았다. 전산망은 기본적으로 출판 관련 업체들이 이용하는 출판유통 판매·정보 인프라이지 요술 방망이가 아니다.
전산망 사업은 어디까지나 ‘민간 주도’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업계 숙원으로 추진되는 사업인 만큼 정부는 지원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출판유통의 합리적 운용을 위해 전산망이 필요하므로 운영과 책임 모두 민간의 몫이어야 한다. 또한 운영수수료 등으로 자체 수익모델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정부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 캐나다가 좋은 사례다. 민관의 불협화음이 아니라 협업을 통해 출판 발전에 기여하는 전산망을 기대한다.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서점에서 책을 찾아보고 있는 한 시민의 모습.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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