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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피렌체의 ‘리비우스’, 공화국의 역사를 예찬하다

등록 2021-04-23 05:00수정 2021-04-23 09:20

[책&생각] 임병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
④ 피렌체의 ‘공식’ 역사가 레오나르도 브루니

현대의 경험을 반추하고 옹호하는 교사로서의 역사
초기 작품에 과장과 수사 가득했다는 비판 받기도
17세기 필사본의 삽화로 남아 있는 브루니의 측면 초상. 트렌토 공립도서관 소장. 위키미디어
17세기 필사본의 삽화로 남아 있는 브루니의 측면 초상. 트렌토 공립도서관 소장. 위키미디어

1429년 봄 밀라노의 공작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 앞으로 의미심장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다. 도시의 대주교 카프라가 쓴 그 편지는 최근 피렌체에서 출판된 “여섯권의 책”이 피렌체인들의 “영예”를 칭송하고, 그와 반대로 밀라노인들이 거둔 모든 “업적을 희석”시키면서 “우리의 군주와 조국을 폄훼하고 있다”는 우려를 담고 있었다. 카프라가 염두에 둔 것은 옛 친구였던 피렌체의 서기장 레오나르도 브루니가 총 12권으로 쓴 <피렌체 시민사>의 첫 여섯권이었다. 그는 이 새로운 피렌체의 역사가 공작 개인뿐만 아니라 자신의 조국에도 아주 해로운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염려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라도 밀라노 궁정에서 브루니에 버금가는 뛰어난 문사를 등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15세기 초반의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 지성계는 ‘아방가르드’ 휴머니스트들의 경연장이었다. 고전고대의 부활을 소명으로 받아들이고 고전지식의 습득에 매진했던 혈기 방장한 젊은 학자들이, 이전 세대 살루타티의 지적 세례를 받으며, 우후죽순처럼 등장했기 때문이다. 브루니는 이 열정적인 고전주의 문화를 선도했던 당대 최고의 휴머니스트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였다. 더욱이 그는 오랜 기간 피렌체의 공직자로 일하면서 공동체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는 새로운 시민 윤리와 피렌체 공화국의 정치체제를 옹호하는 여러 논고를 저술했고, 그 점에서 오늘날에는 초기 르네상스 최고의 정치사상가로 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당대인들은 그를 다른 무엇보다 역사가로 기억하고 평가했다. 1444년 그가 사망했을 때 그를 기리기 위해 도시 당국의 의뢰로 제작된 석관에도 이와 같은 역사가로서의 모습이 전면에 나타난다. 오늘날 산타크로체 교회에 남아 있는 이 석관 위에는 머리에 화관을 두르고 평화롭게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는데, 거기에 재현된 브루니가 자신의 가슴 위에 소중하게 품고 있는 책이 바로 <피렌체 시민사>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아래에는 브루니가 죽으면서 그리스와 로마의 모든 뮤즈들이 눈물을 멈출 수 없게 되었고, 이제 웅변의 이상이 사라졌으며 “역사는 비탄에 빠졌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망각으로부터 업적 지키는 역사 서술

당대 최고의 고전학자이자 피렌체의 애국자였던 브루니에게 역사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미 1410년대 중반부터 브루니는 휴머니스트 본연의 해박한 고전지식에 기초해 플루타르코스나 리비우스 등의 고대 역사가들의 저작을 두루 읽고 그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로마의 역사를 해석하면서, 이른바 ‘근대’ 역사가로서의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키케로와 포에니전쟁 등을 다룬 이 초기 저작들에 따르면, 올바른 역사 서술이란 개별 사건들을 “인과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하나의 내러티브”로 엮어낸 “역사가의 판단”이자 “공적 표현”이었다. 특히 그는 “선조들의 영예를 기리고 그들의 위업과 관련된 찬란하고 위대한 기록들이 소멸되지 않도록” 과거 사건을 기록하고 “주해”하는 것이 역사의 참된 목적이라고 적었다.

카프라의 편지는 브루니 역사 서술의 중요한 일면을 비추는 거울이 될 만하다. 1427년 생애 두번째로 서기장으로 임명된 이후부터 1444년 삶을 마감할 때까지 브루니는 피렌체의 외교문서를 관장하는 공적 임무를 수행했고, 그 결과 당대인들에게는 그가 저술한 피렌체의 역사가 곧 피렌체인들의 ‘공식’ 역사로 간주되었다. 특히 서기장으로 임명된 직후 그가 최근 밀라노와의 전쟁에서 사망한 피렌체의 장군을 기리는 유명한 추도사를 썼다는 점을 고려하면, 카프라의 우려 섞인 반응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피렌체와 자웅을 겨루던 밀라노의 입장에서는 브루니의 역사 서술이 경쟁국 피렌체를 옹호하는 정치적 선전물이나 다를 바 없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 문인으로 칭송받던 브루니가 동시대인들에게 끼친 지적·문화적 영향력을 고려하면, 분명 밀라노 궁정을 감돌던 위기감은 그저 말뿐이 아니었을 것이다.

모범적인 피렌체 시민을 자처하던 브루니에게 피렌체인들의 역사를 기술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피렌체가 이룬 모든 것, 그 가운데에서도 특히 도시의 정치적 경험을 일관된 관점으로 예찬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점에서 그가 현대사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브루니 역시 이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피렌체 시민사> 서문에서 자신의 “시대가 거둔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고, 또 그럼으로써 망각과 운명의 힘으로부터 그것을 구해내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자신만만하게 적었다. 과거의 사건은 동시대 피렌체의 경험을 비추는 준거이자 거울이었고, 그에 관한 역사적 기술은 당대 피렌체의 정치적 행보를 옹호하는 수단이었다.

베르나르도 로셀리노가 1444년 피렌체 도시 당국의 의뢰로 제작한 레오나르도 브루니의 석관. 오늘날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교회에 남아 있다. 위키미디어
베르나르도 로셀리노가 1444년 피렌체 도시 당국의 의뢰로 제작한 레오나르도 브루니의 석관. 오늘날 피렌체의 산타크로체 교회에 남아 있다. 위키미디어

자유 수호라는 명분으로 전쟁 정당화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 아레초 출신이었던 브루니가 피렌체에서 수학하기 시작했던 14세기 말부터 줄곧, 밀라노와의 숙명적인 결투는 피렌체의 존립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초기 이탈리아 정치 세계의 지형을 결정했던 중요한 변수였다. 이런 위험한 상황 속에서 그는 밀라노와의 최근 전쟁을 전제정의 “극단적인 야심과 지배욕, 제국을 확장하려는 가늠할 수 없는 갈망”에 맞선 자유민의 투쟁으로 묘사했다. 밀라노에 대한 피렌체의 저항이 “자유 도시에 태어난 이들이 굴종”을 견딜 수 없어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난 영예로운 일이라는 해석이었다. 물론 브루니에게 이런 동시대 피렌체의 경험을 반추하는 역사의 거울은 찬란했던 옛 로마 세계였고, 특히 ‘공화국’ 로마야말로 자유공화국 피렌체의 모범적 선조였다.

15세기 후반의 유명한 서적상 베스파시아노가 당대의 유명 인사들에 대한 열전을 저술하면서 브루니를 “진실을 왜곡하지 않고 피렌체인들의 명예를 높이기 위해 노력한” 최고의 역사가로 평가했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브루니 스스로도 피렌체의 ‘리비우스’로 자부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고대의 역사가 리비우스가 역사를 기술해 로마를 칭송했듯이, 역사가로서의 자신은 도시의 기원부터 최근 밀라노와 벌인 “가장 위대한 전쟁”에 이르기까지 피렌체의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피렌체와 피렌체인들의 명예를 드높인다는 자의식의 표출이었다.

하지만 피렌체와 경쟁하던 밀라노 쪽의 주장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듯이, 로마의 후손을 자처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행보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브루니의 주장은 당대의 다른 도시민들 사이에서 이미 잘 알려진 피렌체 진영의 정치적 상투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브루니는 15세기 전반 피렌체가 인근 도시 피사나 볼테라 등을 정복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전쟁을 자유의 수호라는 상투적인 관념을 이용해 정당화했다. 일견 제국주의적인 피렌체의 팽창이 공화정기 로마의 팽창과 비교되면서 국가의 명예를 드높이는 일로 해석된 것이었다. 밀라노 편에 섰던 다른 도시의 시민들이 밀라노의 피렌체 침공을 피렌체라는 ‘제국’에 맞선 일종의 해방 전쟁으로 환영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역사는 정치의 중요한 토대였다

16세기 초반의 마키아벨리가 예증하듯 르네상스 시대의 정치사상가들은 역사와 정치를 불가분의 관계로 생각했다. 중요한 정치 현안과의 관련성 속에서 그들의 역사의식이 벼려졌고, 또 그렇기에 특정 정치사상이 그들의 역사 서술이나 인식에 뚜렷이 반영되곤 했다. 특히 고전학문의 부활과 함께 피렌체에서는 역사가 모든 정치적 사고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는데, 브루니는 바로 그러한 전통의 시작이었다. 그에게 역사가 하나의 단일한 이야기(monograph)일 수밖에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또한 바로 그 점에서, 물론 여러 이견이 있겠지만 그의 역사 서술에서 이른바 ‘공화주의’의 향취를 느끼게 되는 것도 당연하다.

한마디로 브루니는 ‘피렌체를 위한 피렌체의 역사가’였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와 같은 브루니의 면모는 그를 피렌체 지성계의 핵심 인사로 각인시킨 15세기 초의 출세작 <피렌체 찬가>에서 이미 드러났다. 인생 말년에 접어든 1440년, 그는 피렌체의 모든 것을 예찬했던 이 초년 시절의 작품이 과장과 수사로 가득 차 있다는 저간의 비판에 대한 소회를 한 친구에게 적어 보냈다. 거기에서 그는 “역사가 진실을 추구해야 한다면 송가는 진실 너머의 많은 것을 칭송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며, 그 비판을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러한 언명과 달리 그에게 피렌체의 역사와 피렌체에 대한 송가 사이에는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피렌체의 애국자 브루니에게 역사는 언제나 “우리를 더욱 현명하고 정숙하게 만드는” 생의 교사였고, 궁극적으로는 조국 피렌체에 바치는 헌사이자 송가였기 때문이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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