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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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슐러 K. 르 귄 지음, 이수현 옮김/황금가지(2021) 어슐러 케이(K). 르 귄의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에는 르 귄이 문학축제에서 작가들에게 한 강연 내용이 나온다. “여러분의 인생 경험을 이야기를 지어낼 구성요소로, 상상의 재료로 쓸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여러분은 갑자기 자유가 되었음을 알게 될 겁니다. 여러분의 이야기는 여러분의 이야기가 아니게 되지요. 여러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이야기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여러분은 자유로이 이야기가 원하는 곳으로 함께 갈 수 있어요.” 나는 이 대목을 읽고 몹시 감동했다. 이야기의 힘을 이렇게까지 믿다니. 나는 이야기를 ‘지어내는’ 작가는 아니지만, 나를 일깨워준 이야기와 함께 살려고 발버둥치는 중이니 르 귄 편이고 자기 인생을 제대로 이야기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애정을 느끼니 르 귄 편이다. 작가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언어공동체의 일부다. 구름과 달은 누구에게나 구름과 달이고 팔짱은 누구에게나 팔짱이다. 미래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몰라도 분명한 것은 우리가 계속 이야기를 할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삶을 언어로, 이야기로 바꾼다. 수세기 전에도 사람들이 태어나 삶을 살고 몇 줄의 이야기로 남겼다고 생각하면 애틋하다. 그러니 이야기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는 소식은 엄청난 희소식이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다. 르 귄은 대체 어떤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이 말을 한 것일까? 지금 쏟아져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은 우리를 주식 사이트나 쇼핑몰 앞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르 귄이 염두에 둔 것은 다른 이야기들이다. 우리를 더 낫게 살게 하는 이야기. 새로운 인간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이야기, 완전히 다른 세계를 상상하게 하는 이야기, 진실한 이야기. 르 귄의 표현에 따르면 “우리가 알아야만 할 것을 알려주는” 작가들이 쓴 이야기다. 책에 거론된 이야기들 중에서 나는 주제 사라마구의 ‘이야기가 원하는 곳’으로 함께 가보고 싶다. ‘매일 식물과 동물 종들이 사라져 가고, 언어와 직업도 사라져간다. 부유한 자는 언제나 더 부유해지고 가난한 자는 언제나 더 가난해진다. (…) 무지는 정말로 무서운 방식으로 늘어가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부의 분배에 있어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광물 착취는 끔찍한 수준에 도달했다. 다국적 기업들이 세상을 지배한다. 우리에게서 실체를 가리는 게 그림자들인지 이미지들인지 모르겠다. (…) 우리는 생각과 행동에 대한 책임감을 내던져 버렸다. 우리는 분개하지도 순응을 거부하지도 저항하지도 않는 무기력한 존재로 바뀌어 버렸다. 얼마 전 과거에만 해도 참으로 강력하게 거부하고 저항하는 존재였는데 말이다. 우리는 문명의 종말에 이르고 있고, 나는 마지막 나팔 소리를 환영하고 싶지 않다. (…) 우리 시대의 상징은 쇼핑몰이다. 하지만 아직은 빠르게 사라져 가는 또 다른 작은 세계가, 소기업과 장인의 작업들이 있는 세계가 존재한다.’ 사라마구의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이야기들이 폭풍처럼 많이 쓰여지고 이야기되고 우리를 예상보다 멀리 멀리 데려가기를 바란다. 르 귄은 시간을 들여 말을 제대로 하는 방법을 배우라고 한다. 그 노력의 보상은 돈이 아니라 자신이 진실하게 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는 “진실을 말한다는 건 대단한 일이고 희귀한 일이에요. 즐기세요!”라고 썼는데 왜 아니겠는가? 보르헤스의 말이 생각난다. “언어공동체 안에서 각자의 의무는 자신의 말을 찾는 것이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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