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휴머니스트 서기장, 공화국의 의미를 묻다

등록 2021-03-26 04:59수정 2021-12-07 11:17

[책&생각] 임병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
③피렌체의 휴머니스트 살루타티
고대의 부활 통해 르네상스 이념 정착시킨 주역
전제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자유와 시민 윤리 강조
1424~1427년 마사초가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에 있는 브란카치 예배당에 그린 벽화의 일부. 가운데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인물이 살루타티로 추정된다. 웹 갤러리 오브 아츠(Web Gallery of Arts)
1424~1427년 마사초가 피렌체 산타 마리아 델 카르미네 성당에 있는 브란카치 예배당에 그린 벽화의 일부. 가운데 두 손을 모으고 앉아 있는 인물이 살루타티로 추정된다. 웹 갤러리 오브 아츠(Web Gallery of Arts)

설령 단테와 페트라르카를 낳았다고 해도, 14세기 초반의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본향이라는 오늘날의 통념과는 사뭇 다른 도시였다. 학문과 문화의 영역 모두에서 다른 도시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던 탓이다. 하지만 14세기 후반부터 이탈리아 곳곳의 여러 젊은이들이 그들 스스로 “영적 스승”이라고 불렀던 피렌체의 한 지식인 주위에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아르노 강변의 그 도시는 서서히 르네상스의 수도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그가 바로 페트라르카에게 감화되어 고전의 부활과 고전적 삶의 모델에 심취했던 피렌체의 휴머니스트 살루타티였다. 그의 교육을 받은 많은 젊은이들이 이후 르네상스 지식인 세계의 주역으로 성장하게 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살루타티야말로 ‘고대의 부활’이라는 르네상스 이념을 되돌릴 수 없는 시대의 가치로 정착시킨 주역 가운데 하나였다.

당대의 한 인사가 그를 “고대의 모든 천재적인 시인들을 부활시킨 웅변의 달인”으로 칭송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살루타티의 고전지식과 수사적 기예는 이전 세대의 페트라르카나 브루니로 대변되는 다음 세대의 수준에 결코 미치지 못했고, 살루타티 스스로도 어떤 일관된 사상을 담아낸 논고들을 그리 많이 저술하지 못했다. 그가 독창적인 사상가나 창조적인 문인이라기보다, 이전 세대에 확립된 고대에 대한 숭모의 관념을 후대에 전달해 고전지식에 기초한 르네상스 문화가 만개하는 데 그 주춧돌을 놓은 ‘교량적’ 인물 정도로 평가되는 이유다. 더욱이 한 편지에서 스스로 이야기했듯이, 살루타티 자신도 시인이나 휴머니스트 학자라기보다 “피렌체의 서기장”으로 불리기를 더욱 선호했다.

아마도 이는 그가 30년 남짓의 오랜 기간을 피렌체의 행정 및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서기국의 수장으로 일하면서 시민의 윤리와 책무를 절감하게 되었다는 점과 무관하지 않다. 이 점에서 1383년 그가 동료 서기장에게 보낸 한 편지는 특히 눈여겨볼 만하다. 1380년대 초반의 피렌체 사회는 혼란의 도가니였다. 1378년 발생한 ‘치옴피 난’의 여파로 시민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반목과 의심이 계속되었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383년에는 흑사병이 또다시 도시를 공포로 몰아넣기 시작했다. 예의 그렇듯이 피렌체의 유력인사들은 이 무서운 질병을 피하기 위해 피난 짐을 꾸렸고, 그 무리에 살루타티의 동료 역시 합류했다. 살루타티의 편지는 “위기의 순간에 조국을 저버린” 동료 공직자의 “정당하지도 않고, 용기 있는 것도, 절제된 것도 아니고 사려 깊지도 않은” 도피에 대한 점잖은 책망이었다.

이 사례가 보여주듯 살루타티의 삶을 지배한 것은 시민으로서의 책임의식이었다. 특히 서기장으로 일하면서 그는 밀라노에 맞선 피렌체의 전쟁을 전제주의에 대항한 자유민의 투쟁으로 정당화하면서, 피렌체인들의 저항을 독려하고 피렌체 공화국의 대의를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자유야말로 진정의 “덕의 교사”이자 “법의 어머니”이며, 자유를 통해서만 인간의 덕과 능력이 온전히 고양될 수 있고 자유를 보장하는 법 아래에서만 공익이 보존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선전전에 직면한 밀라노의 전제군주 잔 갈레아초가 살루타티의 서간 한 통이 마치 천 명의 기병에 맞먹을 만큼의 커다란 위력을 발휘한다고 한탄하며 그에 대한 암살을 기도했을 정도로, 살루타티의 주장은 이탈리아 곳곳에서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키케로와 카이사르에 대해 달라진 평가

두말할 나위 없이 ‘서기장’ 살루타티의 피렌체 예찬에는 ‘휴머니스트’ 살루타티의 해박한 고전지식과 고전에 대한 감수성이 녹아 있다. 그는 피렌체인들이 자유를 사랑하고 도시 피렌체가 자유를 구가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바로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휴머니스트 본연의 고전 탐구를 통해 도시의 역사적 기원을 추적했던 것이다. 공화정기의 로마인 술라로부터 피렌체가 유래했다는 주장이 그 결과였다. 이렇듯 그는 인간 덕의 원천으로서의 자유가 향유되던 공화정기 로마에 주목하고, 피렌체가 공화정 로마를 계승한 ‘작은 로마’라고 자부했다. 결국 이러한 해석과 태도는 다음 세기의 시민적 휴머니스트들에게서 뚜렷이 나타나는 공화주의 역사관의 모범적 선례로 자리 잡는다.

아무튼 이를 고려하면 1392년은 살루타티 개인의 생애는 물론이고 르네상스 휴머니즘의 역사에서 하나의 분수령과도 같은 해였다. 파도바의 한 성당 도서관에 묻혀 있던 키케로의 서간집이 발견되면서 그것의 필사본 하나가 살루타티의 수중에 들어온 것이 계기였다. 이 서간집을 읽으면서 살루타티는 스토아주의 철학자가 아니라 현실 정치에 몸담은 살아 있는 시민으로서의 키케로의 목소리에서 큰 울림을 느꼈고, 결국 그 고대인이 대변하는 시민적 삶을 예찬하면서 카이사르를 공화국에 범죄를 저지른 독재자라고 비난했다. 역사상의 인물 키케로와 카이사르가 과거와는 다른 시각에서 평가되는 의미 있는 순간이었다. 키케로가 시민의 책무를 다한 이상적인 인간의 전형이 되었다면, 이제 카이사르는 공화국의 반역자라는 오명을 입고 역사의 무대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루타티에게서 또 다른 키케로와 카이사르 역시 찾을 수 있다. “오 키케로, 왜 당신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배운 것을 부정합니까?” 밀라노와의 전쟁이 절정으로 치닫던 1400년께, 살루타티는 한 논쟁적인 정치 논고에서 키케로에게 이렇게 도전적인 질문을 던졌다. “정부가 더 나은 이들의 손에 의해 운용되어야 한다는 점이 자연의 이치”라는 예기치 못한 주장과 함께였다. 더욱이 그는 “오 키케로, 만약 당신의 시대에 한 명의 군주가 존재했다면, 아마도 당신은 내전과 그토록 커다란 무질서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카이사르에게 합법적인 군주의 지위를 부여했다. 공공의 안위와 평화 그리고 공동체의 질서라는 명분 아래, 카이사르를 복권시킨 것이었다.

15세기 중반 피렌체의 한 필사본 삽화로 남아 있는 살루타티의 모습. 이탈리아 피렌체 라우렌치아나 도서관(Biblioteca Laurenziana) 소장. 위키미디어
15세기 중반 피렌체의 한 필사본 삽화로 남아 있는 살루타티의 모습. 이탈리아 피렌체 라우렌치아나 도서관(Biblioteca Laurenziana) 소장. 위키미디어

인간을 공동체로 묶는 건 시민정신

그렇다면 불과 10년도 되기 전 ‘시민’ 키케로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에 감화되어 카이사르를 비난했던 살루타티, 더 나아가 평생 자유의 가치를 설파하고 공화정을 옹호했던 살루타티가 노년에 이르러 군주주의자로 돌아선 것인가? 더욱 역설적이면서도 흥미로운 점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밀라노와의 결사항전을 부르짖던 당시의 피렌체인들 어느 누구도 이와 같은 살루타티의 주장에 대해 어떤 반론이나 불평도 표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를 고려하면 그의 변화된 주장은 밀라노의 파상공세에 직면한 피렌체인들이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고안했던 현실적인 대안 하나를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실제로도 당시 피렌체 정부는 밀라노를 제압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힘을 빌리려고 시도했다.

카이사르에 대한 변화된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카이사르가 어떻게 집권했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왜 필요했고 정치 공동체로서의 로마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의 문제가 현재의 상황을 비추어보는 중요한 쟁점으로 대두했던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로 그런 맥락에서 살루타티는 “덕성 있는 군주의 정당한 명령에 복종하는 것보다 더 큰 자유는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는 공화국(res publica)이 군주정에 반대되는 어떤 정치 체제라기보다 정치공동체 자체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삶을 강조했던 살루타티가 이제, 이후 세대가 치열하게 논쟁하게 될, 공화국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명확하게 제기한 셈이다.

이 논고가 노년의 학자 살루타티에게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을 지옥에 위치시킨 단테의 결정이 과연 옳았는지 물었던 어떤 젊은 학생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작성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그에 대한 답에 앞서 살루타티는 인간은 홀로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동료 시민들을 위해” 창조되었고, 시민정신을 통해 비로소 모든 인간이 하나로 묶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다른 도시의 젊은 학생이 던진 난해한 질문에 애써 답하려는 것도, 결국 그러한 공동체 정신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하물며 그가 제기한 질문이 자신이 존경했던 “동향의 시민” 단테에 대한 평가를 묻는 것이라면, 살루타티는 그에 대한 답을 결코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시민의 공동체 정신이라는 문제와 공화국 피렌체에 대한 애국적 정서가 단테와 관련된 응답 속에서 하나로 버무려질 터이기 때문이었다. 모든 젊은 고전학자들의 영적 스승 살루타티에 의해, 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고전지식에 기초한 르네상스 공화사상의 첫 깃발이 그렇게 올려졌다.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소방관’ 곽경택 감독 호소 “동생의 투표 불참, 나도 실망했다” 1.

‘소방관’ 곽경택 감독 호소 “동생의 투표 불참, 나도 실망했다”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2.

신라왕실 연못서 나온 백자에 한글 ‘졔쥬’ ‘산디’…무슨 뜻

이승환, 13일 윤석열 탄핵 집회 무대 선다…“개런티 필요 없다” 3.

이승환, 13일 윤석열 탄핵 집회 무대 선다…“개런티 필요 없다”

탄핵 집회에 힘 싣는 이 음악…‘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4.

탄핵 집회에 힘 싣는 이 음악…‘단결한 민중은 패배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구를 떠날 수 없는, 떠나선 안 되는 이유 5.

우리가 지구를 떠날 수 없는, 떠나선 안 되는 이유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