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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보카치오, 페트라르카에게 도전하다

등록 2021-02-26 04:59수정 2021-02-26 09:17

[책&생각] 임병철의 이탈리아 르네상스인들
②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통속 작가’ 단테와 ‘모범 시민’ 단테, 두 엇갈린 평가
‘명상적 삶’ 대 ‘활동적 삶’, 지식인의 이상적 삶이란?

조르조 바사리가 1569년 그린 <6인의 토스카나 시인들>. 가운데 월계관을 쓴 세 인물이 왼쪽부터 각각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단테다. 임병철 교수 제공
조르조 바사리가 1569년 그린 <6인의 토스카나 시인들>. 가운데 월계관을 쓴 세 인물이 왼쪽부터 각각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단테다. 임병철 교수 제공

1351년 여름에서 1353년 사이의 어느 날 보카치오는 당대 최고의 시인이자 지식인으로 명성을 날리던 페트라르카에게 자신이 직접 필사한 단테의 <신곡> 사본을 선물로 보냈다. 특별한 제목 없이 “논란의 여지 없는 이탈리아의 영예”라는 구절로 페트라르카를 칭송하면서 시작하는 자작시 한편이 그 속에 동봉되었다. 하지만 페트라르카 예찬이라는 겉모습과 달리 지난 세기의 시인 단테가 더욱 부각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와 그가 보낸 <신곡>은 보카치오의 저의를 의심케 만들기에 충분하다. 보카치오가 “이 동료 시민(단테)을 학자이자 시인”으로 받아들이고, 그의 <신곡>을 “주의 깊게 읽고 익히고 또 인정하라”고 페트라르카에게 권고했기 때문이다.

중세 세계관의 문학적 결정판으로 평가되는 불후의 고전 <신곡>의 저자로서, 단테는 살아생전부터 대중의 사랑과 각광을 한 몸에 받던 최고 작가였다. 이후 세대인 페트라르카의 명성 또한 그에 못지않았다. 고전에 기초한 문학 활동은 그에게 로마 전통에 입각한 계관시인의 영예를 선사했고, 서정적이고 감미로운 그의 시풍은 이후 서유럽 시인들의 규범으로 자리 잡았다. 페트라르카보다 열살가량 어렸던 보카치오는 일반적으로 <데카메론>의 저자로만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젊은 시절부터 단테와 페트라르카를 흠모했던 그는 수많은 서정시와 도덕 논고를 저술한 문학가이자 지식인이었다.

단테에 대한 평가에 도사린 갈등

15세기 르네상스인들은 이들을 이탈리아 문학계의 ‘3대 왕관’(tre corone)으로 칭송하며, 그들의 위상에 관한 크고 작은 논쟁을 벌였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르네상스의 본향이자 그들의 고향인 피렌체에서 더욱 두드러졌는데, 최고의 문인이자 학자를 배출한 도시로서 그들에 대한 평가가 도시의 영광을 기리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았던 탓이다. 특히 단테와 페트라르카가 비교의 핵심이었다. 단테는 일찍부터 현실 정치에 뛰어든 능동적인 시민이었고, 결국 정쟁에 휘말려 고국에서 추방된 망명객으로 삶을 마감해야 했다. 이와 달리 페트라르카는 파도바, 아비뇽, 밀라노 등의 여러 도시를 오가며 세파에 초연한 이른바 ‘세계시민’으로서의 삶을 추구했다. 또한 <신곡>이 대표하듯 단테가 주로 피렌체 속어로 글을 썼던 것과 달리, 뼛속 깊은 고전주의자 페트라르카는 속어를 폄훼하고 라틴어를 중시했다. 속어로는 고귀하고 진중한 생각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렇다면 그들이 각각 최고의 중세인과 최초의 르네상스인을 표상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당대인들에게는 둘 사이의 비교가 그처럼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르네상스기 내내 뮤즈의 영광을 지상에서 구현한 천품의 시인이라는 단테의 명성이 계속되었던 탓이다. 그로 인해 최고를 꿈꾸던 이후의 문인들에게는 그와의 비교가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았다. 보카치오와 페트라르카 역시 마찬가지였다. 일찍부터 단테를 숭모하면서 그를 모방할 만한 근대 작가로 칭송했던 보카치오와 달리, 페트라르카는 단테에게 의도적인 냉담이나 무관심 이상을 표현하지 않았다. 단테가 “선술집이나 광장의 무지한 이들”에게나 어울리는 저속한 언어에만 능통했고, 그렇기에 그의 책들은 한낱 “생선 가게의 포장지”로나 사용될 수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했을 정도다.

물론 특유의 명예욕이 이러한 평가에 한몫했겠지만, 라틴 전통에 기초한 새로운 문화를 선도하던 페트라르카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단테가 고전에 무지한 구시대의 통속 작가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페트라르카에게 보낸 보카치오의 시와 선물을 단순한 우호의 표현으로만 보기 어려운 까닭이다. 물론 작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초년 시절부터 보카치오는 페트라르카를 존경했고, 오랜 기간 수십통의 편지를 주고받을 정도로 둘 사이의 관계는 각별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 해도, 특히 단테에 대한 평가를 둘러싼 문제에서, 그들은 오늘날의 우리가 정확히 알기 힘든 의미 있는 갈등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뇰로 브론치노가 1530년 그린 &lt;단테의 알레고리적 초상&gt;. 임병철 교수 제공
아뇰로 브론치노가 1530년 그린 <단테의 알레고리적 초상>. 임병철 교수 제공

“악의 추종자” 보카치오의 비판

평생에 걸친 교류에도 불구하고 둘 사이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단지 세차례에 불과했다. 그 가운데 1351년의 두번째 만남이 특히 흥미롭다. 그해 여름 보카치오는 파도바에 체류하던 페트라르카를 방문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본래 보카치오의 이 여행은 다분히 정치적인 것이었다. 피렌체 정치문화계의 핵심 인사였던 그에게 도시 당국은 피렌체를 위협하던 밀라노에 맞서 북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을 규합해 이른바 반밀라노 전선을 구축하라는 임무를 맡겼고, 거기에 페트라르카를 피렌체로 귀국시키는 일도 포함된 듯하다. 1349년 새롭게 문을 연 피렌체대학교에 페트라르카를 교수로 초빙해 도시의 명예를 더한층 높이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이미 아비뇽 교황청으로 거처를 옮기기로 마음먹은 페트라르카는 보카치오가 전한 피렌체인들의 이 제안을 일축해버렸다.

보카치오를 실망시킨 것은 이 예기치 못한 거절뿐이 아니었다. 페트라르카의 서재에서 단테의 <신곡>을 찾을 수 없었다는 일견 단순한 사실 또한 그를 더욱 의아하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후의 어느 시점에 그가 보낸 <신곡> 사본과 시는 본받아야 할 모범 시민의 전형으로 단테를 추켜세우면서 페트라르카에게 의도적으로 던진 보카치오의 점잖으면서도 우회적인 도전장이 아니었을까? 그가 단테의 삶을 지식인의 사회적 책무라는 차원에서 재구성하고, 지식인이나 학자에게 요구되는 이상적 삶이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단테는 최고의 문인이면서도 공동체의 문제에도 역시 적극적으로 헌신했던 훌륭한 시민의 표상, 즉 “피렌체인들의 영광”이었다.

1353년 이 문제와 관련된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사이의 잠재적 갈등이 드디어 수면 위에서 폭발했다. 페트라르카가 밀라노 궁정에 출사한다는 소식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이에 보카치오는 “악의 추종자”가 되면서 모든 영예를 던져버렸다고 페트라르카를 거세게 비난했다. 페트라르카의 행로가 “조국에 해로운” 정치적 “죄악”이며, 동료 문인들에 대한 문화적 “범죄”라는 일갈이었다. 남아 있는 기록으로만 판단한다면, 이에 대해 페트라르카는 아무런 직접적인 대응도 하지 않았던 듯하다. 다만 보카치오와 친분이 있던 피렌체의 한 인사에게 편지를 보내, 그저 자신은 “가장 완벽한 고독과 여가”를 보장한 밀라노 군주의 약속을 믿고 “평화에 대한 자연적인 본능”을 따랐을 뿐이라고 조심스럽게 변호했다.

고독할 자유 추구한 페트라르카

이에 대한 보카치오의 응수도 확인할 길이 없지만, 분명 피렌체 시민으로서 공적 삶을 살았던 그에게는 페트라르카가 사적인 변명만을 늘어놓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의미심장하게도 페트라르카의 이 결정에는 소위 ‘명상적 삶’의 이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다음 세기의 여러 르네상스 지식인들은 ‘활동적·정치적 삶’과 ‘명상적·은둔적 삶’이라는 두 이상에 기대어 지식인의 올바른 삶에 대한 논의를 확대해갔다. 한편에서는 공동체에 대한 봉사와 기여 그리고 공사(公事)에 대한 책임을 강조했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지식인의 자유를 구실 삼아 혼탁한 세상의 질곡에서 벗어난 여가와 평화, 즉 고독을 예찬했다. 어쩌면 단테를 둘러싼 보카치오와 페트라르카 사이의 갈등은 바로 그 상반된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정확한 정황은 알 수 없지만 이후 그들은 화해했고 죽을 때까지 예년의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서 벌어진 짧은 논전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생각거리를 던져준다. 고전의 부활이나 교양의 증진과 관련된 엇갈린 견해, 서로 다른 정치적 경험에서 비롯된 조화할 수 없는 인간관의 깊은 심연이 그 속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고전을 통해 인간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속어에 의존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절망감이 감지되기 시작했고,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라는 엄중한 질문 또한 지식인들 앞에 던져졌다. 이후 세대의 르네상스 지식인들이 힘겹게 씨름하게 될 난제들이 이 14세기 두 지식인의 숨은 논쟁에 똬리를 틀고 있었던 셈이다.

말년에 이르러 페트라르카는 <데카메론>의 유명한 이야기 한편을 라틴어로 번역해 보카치오에게 보냈고, 비록 마무리짓지는 못했지만 단테의 <신곡>을 주해하고 강의하는 일이 보카치오의 마지막 지적 작업이 되었다. 인간의 교양을 위한 속어와 라틴어의 역할, 지식인의 시민적 삶에 대한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의 엇갈린 생각이 그들의 삶에 남긴 마지막 흔적들이다.

임병철 한국교원대 역사교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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