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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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김승욱 옮김/책세상(2016) 한해의 끝에 내가 하필이면 김진숙을 가장 많이 떠올리게 될 줄 나도 몰랐다. 내가 그녀를 처음 본 것은 2011년 희망버스를 타고 부산 영도 한진중공업에 갔을 때였다. 당시 그녀는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있었다. 나도 크레인에 올라갔다. 방송용 인서트 컷을 따기 위해서였다. 다리가 떨렸다. 밤하늘을 배경으로 우뚝 선 크레인 위에서 그녀는 희망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연설했다. “저를 보지 마시고… 자신은 해고되지 않았지만 형이 해고돼서 여기 있는 ㅇㅇ” 그 순간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시간도 잠시 멈췄다. “어린 두 아이를 두고 온 ㅇㅇ,. 어머니가 병원에 있는데도 여기 있는 ㅇㅇ…” 그녀는 계속계속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하고 먼 곳에서 온 것처럼 아득했다. 내 평생 들어본 가장 선한 목소리였다. 나는 훗날 사람들에게 그녀는 몸 안에 내장이 아니라 동굴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게 되었다. 목소리의 색깔이 달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몸속에 있는 뭔가를 둥글고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뒤로 나는 남몰래 그녀에게 비밀스러운 도움을 받곤 했다. 내가 자아폭풍에 시달리는 날, 내가 한 일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서 은근히 화가 나는 날, 나를 사랑하려고 했지만 하도 실망스러워서 탄식만 하는 날, 서럽고 억울한 일이 많은 날, 그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를 보지 마시고…” 이상하게 그 목소리가 떠오르면 들끓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좀 부끄러워졌다. 그리고 곧 따뜻한 감정이 밀려왔다. 나는 한 사람의 진실된 마음이 얼마나 힘이 되는지 알게 되었다. 그리고 9년이 흘렀다. 그사이에 간간이 그녀의 소식을 들었다. 끝내 복직을 하지 못했고 암에 걸렸고 재발했다는 것까지. 그녀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일손을 멈추었다. 12월31일 정년까지 며칠 남지 않은 시간 안에서 그녀는 복직투쟁을 시작했다. 그녀를 지지하기 위해서 12월19일, 9년 만에 드라이브 스루 희망버스가 부산으로 갔던 날, 나는 다시 그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새 그녀의 높던 목소리는 많이 낮아졌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였다. “김주익 지회장도 85크레인에서 내려오지 못했습니다. 재규형은 4도크에서 올라오지 못했고, 정리해고 투쟁을 가장 열심히 했던 강서도 복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들과 함께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는 새해 1, 2월 방사선 치료 잘 받고, 3월달의 수술도 잘 해내겠습니다. 9년 전 희망버스와 조합원들의 힘으로 85크레인을 웃으면서 내려왔듯이 웃으면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투쟁!” 그녀가 함께 공장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한 사람들은 모두 고인이다. 서른다섯에 죽은 최강서는 그녀 덕분에 내 가슴에도 살아 있다. 최강서가 죽었을 때 김진숙은 이렇게 통곡했다. “사랑한다는 말보다 해고는 살인이다는 말을 더 많이 한 서른다섯살 강서야.” 나는 이제 김진숙에게 그리고 죽은 동료를, 죽은 자식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법을 알고 있다. 파랗게 젊은 아들을 잃은 다비드 그로스만의 책 <시간 밖으로>의 문장을 빌리면 이렇다. “그가 우리들 각자에게 따스한 미소를 짓는다. 또한 우리들 각자가 마음 속에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웃어주는 것 같다.” 김진숙에게 웃으면서 인사하려면 바로 이렇게 해야 한다. 그녀가 가슴에 품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웃으면서 인사를. 모두 기쁜 크리스마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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