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리오스의 거상이 있던, 태양의 축복 받은 로도스섬
성 요한 기사단이 세운 중세양식 성벽 등 흔적 남아
성 요한 기사단이 세운 중세양식 성벽 등 흔적 남아
[책&생각] 신화와 축제의 땅, 김헌의 그리스 기행
⑬그리스 로도스섬의 탄생
예수의 제자 요한은 파트모스섬에서 생의 마지막 날을 보냈다. 섬 꼭대기에 그가 기거하며 계시록을 썼다는 동굴이 있다. 그 동굴을 작은 교회가 감싸고, 요한수도원이 그 전체를 둘러서 조성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 섬을 ‘에게해의 예루살렘’이라고 부르곤 한다. 우리 일행은 이곳을 둘러본 뒤에 다시 크루즈에 올랐다. 선상 뷔페에서 만찬을 즐기는 동안, 배는 남쪽을 향해 서서히 움직였다. 철썩이는 파도를 타고 불어오는 바람은 끈적이지 않고 맑고 상쾌하게 살갗을 스쳐 갔다. 에게해로 번지는 석양 노을을 감상하며 고대 그리스 문명과 역사, 신화를 이야기하는 동안 밤은 짙고 푸르게 깊어갔다.
새벽녘에 일어나 선상 갑판으로 나갔을 때, 아침노을에 붉게 물든 로도스섬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밤새 약 300㎞를 달려온 것이다. 크루즈가 정박하는 터미널로 들어서기 직전, 중세양식의 탑으로 세워진 성 니콜라스 요새가 한눈에 들어왔다. 먼 옛날, 그 자리에는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거대한 신상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280년쯤, 로도스섬 출신의 조각가 카레스의 작품이었다. 이 거상(33m)은 미국 뉴욕에 있는 자유의 여신상(46m)보다는 작지만, 그 시대에 이런 엄청난 청동상을 세웠다는 것은 기술적으로 놀라운 일이다. 헬리오스는 머리에 태양광선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관을 쓴 모습으로 그려진다. 자유의 여신상이 머리에 쓴 것과 거의 흡사하다. 아마 옛 로도스인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본다면, 헬리오스의 거상과 매우 닮았다며 깜짝 놀랄 일이다. 알렉산드로스의 후계자 중 하나인 안티고노스의 아들 데메트리오스 1세가 로도스섬을 침략했을 때, 이를 막아낸 로도스인들은 헬리오스가 자신들을 도와줬다고 굳게 믿고, 그 거상을 세웠다. 헬리오스가 로도스의 수호신인 까닭이다.
헬리오스는 제우스에게 사촌 형이었고, 제우스의 아들 아폴론에게는 5촌 당숙이었다. 제우스가 세상의 지배자가 되었을 때, 태양을 다스리는 권한을 자기 아들인 아폴론에게 주었지만, 태양의 마차를 타고 세상을 비추는 역할은 계속 헬리오스가 맡은 것으로 보인다. 옛날 사람 중 많은 수가 헬리오스와 아폴론을 혼동했지만, 일반적으로 둘은 구별된다.
델로스섬이 아폴론의 고향으로서 태양의 섬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로도스야말로 태양의 신의 도시라고 할 만하다. 태양의 뜨고 짐을 사방에서 볼 수 있어 찬란하면서도 척박한 델로스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인간이 살아가기에 비옥하고 가축들에게도 온화한 땅이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태양의 축복을 받은 섬이다.
로도스섬 출신의 디아고라스는 당대 최고의 권투선수로 명성이 드높았다. 그는 제79회 올림피아 제전(기원전 464년)의 권투 경기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올리브관을 썼을 뿐만 아니라 피티아 제전 등 주요 권투 경기에서 우승한, 불세출의 ‘주먹’이었다. 로도스 사람들은 섬을 통치하던 귀족 가문 출신인 그의 위력에 놀라고 반한 나머지 그를 헤르메스의 아들이라고 추켜세웠다. 범 그리스 제전의 찬가 전문 서정시인 핀다로스는 디아고라스를 위해 올림피아 찬가(7번)를 썼다. 그 시는 디아고라스의 고향인 로도스섬의 탄생을 신비롭게 노래한다.
어느 날, 제우스는 신들과 함께 회의했다. 세상의 모든 땅을 골고루 나누기 위해서였다. 그때 무슨 사정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헬리오스는 신들의 모임에 참가하지 못했다. 다른 신들은 그를 전혀 신경 쓰지 않은 채 땅을 모두 나눠 가졌고 그를 위해서는 아무런 땅도 남겨두지 않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헬리오스는 제우스에게 따졌다. 다시 제비를 뽑아야 할까? 헬리오스는 그럴 필요 없다며, 바다 깊은 곳에 봐둔 땅이 하나 있으니 그것을 갖겠다고 했다. 얼마 후, 그의 말대로 커다란 섬이 바다 위로 떠오르자 그것을 자신의 몫으로 삼았다. 헬리오스는 그곳에서 아프로디테의 딸 로도스와 누워 사랑을 나누었고, 둘 사이에는 일곱 명의 아들이 태어났다. 다른 작가들에 따르면, 로도스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딸이라고 한다. 이렇게 해서 그 섬은 로도스라 불리며 태양의 신 헬리오스의 섬이 되었다. 위기를 극복한 로도스인들이 섬의 초입에 그의 거상을 세운 건 그런 까닭에서였다.
비잔티움 출신의 뛰어난 엔지니어였던 필론은 로도스를 방문하여 그 거상을 보며 경탄했다. 필론은 알렉산드로스가 정복하여 이룬 거대한 제국 이곳저곳에서 인간들이 만들어놓은 경이로운 건축물들을 탐방하며 기록을 남겼다.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Thaumata)’라고 불리는 것들인데, 그의 글의 원래 제목은 ‘7가지 장관(壯觀: Theamata)에 관하여’였다. 고대인들은 원제목의 ‘테아마타’(볼거리)를 ‘타우마타’(경탄거리)로 잘못 읽고(?) ‘불가사의’라고 새겼고, 지금까지도 그렇게 불린다. 필론의 글은 이렇게 시작한다. “일곱 가지 장관 하나하나는 너무 유명해서 모든 사람이 알고 있지만, 직접 눈으로 본 사람은 아주 드물다.” 왜냐하면 당시 교통수단으로는 엄청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는 이것들을 모두 둘러보기가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일곱 가지 장관을 다 보려면 운도 따라야 한다. 지금 우리는 오직 이집트의 피라미드만 볼 수 있다. 그것도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 당분간 보기가 힘들다. 필론이 소개한 바빌론의 공중정원, 올림피아의 제우스 신상, 바빌론의 성벽,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할리카르나소스의 마우솔레움은 아예 사라져버렸다. 필론도 자칫 헬리오스 거상을 소문만 듣고 못 볼 뻔했다. 필론이 거상을 본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 로도스를 뒤흔든 지진이 그것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이 있지만, 아무리 길어도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는가 보다. 신도 자신의 신상을 지키지 못하니 말이다.
운 좋게 필론은 일곱 가지 장관을 모두 보았지만 무척 고단했던 모양이다. 그는 말한다. “이 일곱 가지 장관을 보려고 집 밖으로 나가 세상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여독으로 쇠약해졌다. 보고 싶은 욕망을 다 채우고 나니, 그렇게 흘러간 연수에 짓눌려 이제 인생은 살아갈 날을 거의 다 잃고 말았다.” 회한이 가득하다. 그러나 죽기 전에 인간들이 만들어낸 걸작들을 맘껏 볼 수 있어서 여한이 없다, 이 또한 괜찮은 삶이 아니겠느냐는 자족의 여운도 느껴진다. 거상이 사라진 곳을 보며 상상의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올랐으니 말이다.
헬리오스 거상이 있던 자리의 요새 뒤로는 중세양식 성벽이 해안선을 따라 도시를 단단하게 감싸고 있다. 철통같은 요새다. 이 성벽은 1306년부터 로도스섬에 터를 잡은 성 요한 기사단이 세웠다. 이 기사단은 처음에는 예루살렘의 세례요한 묘지에 진료소를 세우고 의료 활동을 하였지만, 이슬람과의 십자군 전쟁을 통해 점점 군사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291년 무슬림의 공격을 버텨내지 못하고 예루살렘을 떠난 성 요한 기사단은 키프로스를 거쳐 로도스에 정착하였다. 그들의 명성은 100배에 가까운 전력으로 로도스를 공격한 오스만제국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로도스시는 그 군사적 성공을 증언하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잘 보전되어 있어 오늘날에도 그 당시 기사단의 위용을 단단하게 간직하고 있다. 기사단장의 궁전에서부터 바다로 이어지는 출입문까지 경사면을 따라 ‘한 땀 한 땀’ 닦여 있는 ‘기사들의 거리’를 걷다 보면, 중세로 시간을 넘어서 들어선 기분이 든다. 당시 기사들의 집 출입문에 문패처럼 새겨져 있는 가문의 문장(紋章)들은 자신들의 역사에 관해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뭔가를 속삭이는 것 같다.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크루즈 선착장에서 본 로도스섬의 모습. 김헌 제공
최고의 권투선수 디아고라스의 고향
헬리오스 거상 상상도. 위키피디아
고대 세계 7대 불가사의, 헬리오스 거상
성 요한 기사단장의 궁전. 김헌 제공
‘한 땀 한 땀’ 닦여 있는 ‘기사들의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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