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입술 모양의 그늘
이하나 지음(독립출판물, 2020)
입술 모양의 그늘
이하나 지음(독립출판물, 2020)
어떤 시나 소설은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 할수록 자꾸 그 시와 소설이 간직한 아름다움으로부터 멀어지는 것 같다는 느낌을 선물한다. 아마 거기엔 언어화할 수 없는 빛 같은 게 있어서일 것이다. 별다른 말이 보태어지지 않더라도, 오직 작품이 건네는 말들과 그것을 건네받은 내가 있는 곳을 만드는 빛.
그런 작품을 읽은 날에는 말을 아끼게 된다. 대신에 친구들에게 ‘참 좋으니 읽어봐’ 라는 말로만 그 충만해진 마음을 전하게 된다. 나의 말이 그 아름다움을 해칠까봐,라기보다는, 나의 말이 멈춘 자리에 들어선 그 시와 소설의 빛이 내 몸 안에 좀 더 머물렀다 갔으면 하는 바람이 커서일 것이다. 이 빛이 왜 번지고 있는지 오래도록 생각하고 싶어서, 먼 후일에 그것이 좋았노라고 보탤 말을 찾을 날이 올 때 좀 더 잘 얘기하고 싶어서일 수도 있다. 시와 소설을 만난 직후 말을 아끼게 되는 순간이 생기는 걸 ‘선물’이라 표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떤 시나 소설은 별다른 이유를 찾기 쉽지 않아도 우리 마음에 와 머물면서 삶을 다독이는 방향의 생각으로 우리를 이끈다. 말없이도 우리는 기쁠 수 있다.
이하나의 소설 <입술 모양의 그늘>을 읽다가, 별다른 말을 보태지 않더라도 거기에 있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순간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눌 줄 아는 소설 속 인물들로부터 그런 빛을 선물 받은 기분이 들었다. 읽는 내내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페이지가 많지만, 여기 허락된 지면에서는 소설 속 ‘내’게 ‘언니’가 버스 운전을 하는 엄마를 따라 막차에 올랐던 경험을 들려주는 장면을 잠깐 나누기로 한다.
“‘고3을 앞둔 크리스마스이브였는데, 겨울이어서 그랬는지 그날따라 하늘이 캄캄했어. 한여름에도 종점으로 회차 할 시간이면 해가 진 지 오래인 건 마찬가지인데, 기온에 따라 공기의 밀도나 색이 달라지는 거겠지, 아마. 날이 추운 탓인지 손님도 진작 모두 내리고, 엄마가 버스 안 조명을 껐어. 라디오에서 먼 나라의 소년 합창단이 부르는 캐럴이 흘러나오는데, 세상에 빛도, 소리도, 나도, 사라지고 오로지 꼭 그 노래만 홀로 남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소리가 없다면 지금 들리는 저 음악은 무엇이지? 내가 없다면, 지금 듣고 있는 이 존재는 누구지?’
언니에게 그 얘기를 들은 후로, 잠 못 이룬 새벽, 먼 데서 큰 바퀴 소리가 들려오면 언니와 언니의 어머니가 단둘이 타고 가는 텅 빈 버스가 가만히 감고 있는 눈꺼풀 안쪽에 그려졌다. 그 버스는 마치 아버지의 안경원처럼 환하다. 종점에서 출발하는 첫차거나 종점으로 돌아가는 막차니까 버스의 둘레는 언제나 어둑해야 한다. 그 점이 버스를 더욱 빛나게 한다. 움직이는 빛의 상자.”(이하나, ‘입술 모양의 그늘’ 부분, 23~25쪽)
영영 만질 수 없는 것에 ‘빛’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하지만, 우리 마음에 와 머물면서 우리의 삶을 다독이는 어떤 생생한 순간에 대한 이야기, 그런 순간을 간직한 몸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이야기를 두고도 ‘빛’이라 부를 수 있다는 걸 나는 이제야 안다. 환하고 따뜻한 그것이 요즘처럼 많은 이들이 외로움을 느끼는 때 필요하다는 것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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