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명, ‘물류창고’
물류창고/문학과지성사(2018)
어떤 시기에 읽히느냐에 따라 시는 독자들에게 다른 의미를 건네기도 한다. 이는 시를 이루는 언어가 고정된 대상만을 겨누고 있지 않다는 특징을 갖기 때문일 것이다. 이수명의 시집 <물류창고>를 최근에 다시 읽다가, 시에서 그리는 현실과 우리 삶의 한 풍경이 겹치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간의 나는 시인의 시를 삶의 한가운데를 전하는 작품을 살피기 위한 시선으로가 아닌, 삶의 형식을 첨예하게 언어화한 작품을 살피는 관점으로 읽어왔었다. 어떤 행동을 하든지 간에 의미 있는 무언가를 산출하지 못한 채 영영 ‘표피’에 머무르는 얘기를 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상태, 주어진 세계에 갇힌 채 그것만을 볼 수밖에 없는 그런 가련한 상태를 명징하게 일러주는 시로, 다시 말해 일상의 재현보다는 일상 이면에 도사리는 악몽을 재현하는 시로 읽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택배 노동자들의 과로사 소식이 계속해서 들리는 이즈음, 이수명의 시는 더 이상 일상 이면에 있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오늘을 예견하고 일찍이 도착한 시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물류창고에서 만났지/ 창고에서 일하는 사람처럼 차려입고/ 느리고 섞이지 않는 말들을 하느라/ 호흡을 다 써버렸지// 물건들은 널리 알려졌지/ 판매는 끊임없이 증가했지/ 창고 안에서 우리들은 어떤 물건들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으로 갔다가 거기서/ 다시 다른 방향으로 갔다가/ 돌아오곤 했지 갔던 곳을/ 또 가기도 했어//(중략)// 물건의 전개는 여러 모로 훌륭했는데/ 물건은 많은 종류가 있고 집합되어 있고/ 물건 찾는 방법을 몰라/ 닥치는 대로 물건에 손대는 우리의 전진도 훌륭하고/ 물류창고에서는 누구나 훌륭해 보였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누군가 울기 시작한다/ 누군가 토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서서/ 등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누군가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고/ 몇몇은 그러한 누군가들을 따라 하기 시작한다// 대화는 건물 밖에서 해주시기 바랍니다// 정숙이라 쓰여 있었고/ 그래도 한동안 우리는 웅성거렸는데/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소란하기만 했는데// 창고를 빠져나가기 전에 정숙을 떠올리고/ 누군가 입을 다물기 시작한다/ 누군가 그것을 따라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조금씩 잠잠해지다가/ 더 계속 계속 잠잠해지다가/ 이윽고 우리는 어느 순간 완전히 잠잠해질 수 있었다”(이수명 ‘물류창고’ 부분)
‘물류창고’에서 만났다는 어떤 이들은 “꼼짝할 수 없”이, “닥치는 대로” 주어진 움직임을 행한다. 급박한 부추김이 이들의 속도를 강제하는 듯 보인다. 자기주도성이 박탈당한 상황에서 이들의 중단 없는 움직임은 “누구나 훌륭해 보”이는 해당 공간을 갑자기 “누군가” “울기 시작”하고 “토하기 시작”하는 공간으로 전환시킨다. “정숙”이란 글자에 따라 모두의 입이 “다물”어지고 “잠잠해지다가” “완전히 잠잠해”졌다고 시가 마무리될 즈음에는, 시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어째 물류창고의 부품에 불과하겠다 싶어 섬뜩함이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다.
일하는 사람이 계속해서 죽는 참혹한 상황을 모두가 ‘보면서’ 별다른 출구조차 마련하지 않는 사회에서 언제까지 살아가야 할까. 시가 폭로하고 있는 벗어날 수 없는 정직한 현실은 어디 멀리의 얘기가 아니다. 오늘 이 순간의 장면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