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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시인의 겹눈

등록 2020-09-18 05:00수정 2020-09-18 09:29

[책&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김복희, ‘검은 비둘기’

시집 <희망은 사랑을 한다>(문학동네, 2020)

김복희 시인의 시에서 말하는 ‘나’는 겹눈을 가졌다. 무슨 소린가 하면, 시에서 화자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살필 때, 당장 눈에 띄는 것만을 전부로 여기지 않고 언제나 하나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감지한다는 얘기다. 시인은 누구와 어디에서 만나건 간에 마치 귀신을 보는 사람처럼, 또는 태양 아래 그림자 없는 이는 없다는 걸 강력히 믿는 사람처럼, 눈에 띄지 않으나 분명히 있는 어떤 존재를 감각한다. 그것의 정체는 ‘나’의 숨겨진(숨길 수밖에 없는) 감정일 때도 있고, 잃어버린 누군가에 대한 기억일 때도 있으며, 소속과 이름이 주어지지 않아 산 채로 방황 중인(유랑 중인) 무언가일 때도 있다. 그이들이 우리 주위의 사물에, 때때로 우리 바로 곁에 머물러 있음을 시인은 분명히 안다. 그러고는 그 사실을 다른 이들에게 알리려고 목청을 높이는 대신에 그이들과 대화하는 유일한 사람이 되기를 자처한다. 겹눈을 가진 이와의 관계 속에서 그이들이 외롭지만은 않기를 바라면서. 그런 바람을 가지고 손을 모으는 사람도 세상엔 있음을 증거하면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을 시에선 모두가 모른 척하지만 사실은 분명히 있는 존재가 시인의 겹눈으로 이뤄진 시야에 들어와 있다.

“태풍/ 무너지는 날에 비둘기는 어디로 가나/ 분명히 지켜보려고 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빗줄기도 제대로 보이지 않네/ 세상이 어둡고 나는 혼자가 아닌데 테이블 위의 음식들이 전부 썩기 시작한다/ 아무도 없고 아무도 없어요? 라고 물어볼 사람도 없고 아무도 없네요! 라고 말할 사람도 없고/ 이 시를 읽어줄 사람도 없고 산비탈 아래 드러난 뼈처럼/ 나는 아주 먼 미래를 보았거나 아주 먼 과거를 보았거나 했네/ 비둘기가 날개를 펴지 못할 정도로 비가 쏟아지고 청소차가 지나간다/ 비둘기 죽은 것을 오래간만에 보았다/ 옛날에 죽은 비둘기 생각을 해 다시 해/ 계속은 아니고/ 비둘기가 나에게 옮아왔다”(김복희, ‘검은 비둘기’ 전문)

‘태풍’이라는 단어 하나로 이루어진 구절이 전하는 무거운 정황을 피할 수 있는 지붕 하나 가지지 못한 “비둘기”는 어디로 갔을까. 시인의 눈엔 이 도시가 “날개를 펴지 못할 정도로 비가 쏟아지”는 속에서 비둘기의 숨을 거두어 가는 게 보이고, 시인의 겹눈엔 “비둘기”란 이름과 더불어 태풍이 몰아치며 휩쓸고 가버린 숱한 존재들의 “먼 과거”가, 그리고 그이들의 목소리를 들을 사람 하나 없는 상황이 지속됐을 때 그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이 없을 “먼 미래”가 보이는 것 같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자연재해인지라 “비둘기 죽은 것”을 못 본 척하자고 말하고 말기엔, 이미 세계가 “무너지”도록 인간이 저질러놓은 과오가 너무 많다. “테이블 위” “썩기 시작한” “음식”을 책임지고 처리해야 할 이들 역시 인간인 ‘우리’일 테다. “비둘기”를 보고 말았기 때문에, “비둘기”가 “나”에게 “옮아왔”기 때문에.

시인의 겹눈은 환상이 아닌 현상을 좇는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 때로는 현실 너머까지 볼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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