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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서로의 연결

등록 2020-08-21 04:59수정 2020-08-21 09:46

[책&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부모의 여자 형제를 부르는 말’

김현 시집 <호시절>(창비, 2020)

한때 마을 사람들이 모여 생선을 경매했던 제주 종달리 어판장에서는 최근 ‘해녀의 부엌’이라는 이름의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예부터 집집마다의 살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왔지만 지금은 그 숫자가 얼마 없는 제주의 해녀들과 젊은 예술가들이 합심하여 해녀의 삶에 대한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뿔소라나 빙떡과 같이 제주의 특색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밥상을 관객들에게 직접 대접하는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내가 본 편에서는 종달리 최고령 현직 해녀 권영희 님의 이야기가 펼쳐졌는데, 할머님 당신의 삶을 엿보고자 했던 관객의 기대를 뛰어넘어 무대 위에선 물질을 하며 홀로 아이들을 키웠다는 할머니의 엄마 이야기가 구현되고 있었다.

예술가들이 해녀로 살아온 세월이 어땠는지 들려달라고 부탁했을 때, 할머니는 자기 자신이 얼마나 고달프게 살았는지 늘어놓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엄마의 물질이 어느 시점에서부터 씩씩해졌는지, 엄마 당신의 몸으로 삶의 굴곡을 어떤 태도로 넘어섰는지, 요컨대 할머니 자신의 삶이 계속될 수 있도록 추동하는 힘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를 말했다. 누구의 소유라고 특정할 수 없는 그 이야기는 그러므로 할머니의 엄마 이야기이기도 했지만 할머니 당신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엄마를 부르며 울먹이는 89살 해녀의 이야기를 듣고 제주의 소박한 밥을 먹고 있자니, ‘나’에 대한 이야기의 형태는 실은 살가운 돌봄에 대한 기억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구나 싶었다. 우리가 지금 이곳에 있다는 사실은, 부분적으로 망각되어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던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점에 대해서도 새삼 떠올렸다.

‘연결’, 요즘 우리가 내내 실감하는 말. 김현의 <호시절>에는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는 흔적들로 엮이고 나아가는 삶에 대한 얘기들이 가득하다. 그중 한 편의 부분을 읽는다.

“순두부 하면 떠오르는 사람/ 이제 없는 우리 이모// 이모 살아 계실 적에/ 이모와 순두부 먹어본 적 없지만/ 니 이모 명태조림 하나면 밥 한그릇 뚝딱했다는 소리/ 부모 명절이면 술에 취해 하고 또 하던 소리// 어린 날/ 명절이면 부르뎅아동복을 사 들고 와/ 서울 얘기 해주고/ 고스톱 치면 뽀찌 떼어 용돈 주던/ 손맛은 없고 손은 커서/ 놀고먹는 남자를 먹여 살리고/ 지 팔자 지가 꼬여 먹었다던 이모// 그런 이모에게서/ 자식이 둘 생겨나/ 부모 그 둘을 자식처럼 키우려고 했으나/ 부모에게도 자식들이 있어/ 밤이면 한 이불 속에서 한숨짓고/ 들어보셔요 여보, 남편// 어느날/ 부모 이모와 함께 동해로 여행을 갔는데/ 이모 사라져서/ 보니 해변에서 눈을 맞고 서서/ ‘동숙의 노래’를 부르고 있더라는/ 청승도 청승도 그런 청승을/ 부모 혀를 차다가도/ 우럭회 한접시를 시켜놓고 앉아/ 창밖을 멍하니 보다가/ 같은 노래 부른 사연//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있나/ 순두부 하면 떠오르는 사람//(중략)// 초당순두부 한봉을 뜯어/ 건더기도 없고 간도 없이 끓여놓고/ 진간장에 다진 마늘 깨소금 대파 고춧가루 한꼬집/ 자식이 된다는 것은 그 모든 걸 만들어놓은 후에/ 부모에게 묻는 것// 순두부 양념간장은 어떻게 만들어야 할까요?”(김현, ‘부모의 여자 형제를 부르는 말’ 부분)

김현의 시 때문에 창밖의 바람소리에도 마음이 쏟아질 것만 같다. 이런 울음은 참 늘 늦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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