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신화와 축제의 땅, 김헌의 그리스 기행
⑦ 4대 범그리스 제전 (4): 올림피아 제전
기원전 776년, 펠로폰네소스반도 서쪽 올림피아에서는 인근 여러 도시에서 온 쟁쟁한 선수들의 달리기 시합이 있었다. 한 스타디온, 약 192m를 달렸다. 지금은 운동경기장을 스타디움이라고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그 말은 원래 길이의 단위였다. 한 스타디온은 성인의 발 크기를 600번 합한 거리다. 192m가 되려면 발의 크기가 무려 320㎜여야 한다. 도대체 누구의 발이 이렇게 ‘왕발’일까? 전설에 따르면, 헤라클레스의 발이다. 그는 자기 발로 600번 또는 200보를 잰 다음 운동장을 곱게 다져 달리기 시합을 열었다. 네메이아의 사자를 비롯해서 저승의 문을 지키는 케르베로스를 지상으로 데려오는 것까지 열두 과업을 성공하자, 벅찬 기쁨을 온 세상 사람들과 왁자지껄 나누는 동시에, 그 모든 영광을 제우스에게 성대하게 돌리기 위해서였다.
올림피아 제전의 주신 제우스를 모신 신전. 현재 34개의 기둥 가운데 단 하나만이 남아 있다. 김헌 제공
누구를 위한 제전인가
직사각형으로 길게 닦인 운동장에 경사진 관람석을 두른 모양은 참 효율적이다. 많은 사람들이 시야에 방해를 받지 않고 선수들의 경쟁에 집중하며 열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 힘만 쓰는 줄 알았더니 천재적인 건축가였다. 그의 발명품이 지금 세계 곳곳에 구현되어 있는 것이다. 스타디온 달리기에 참가한 선수들은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다. 오롯이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힘과 속도의 대결이었다. 첫 우승자는 엘리스 출신의 코로이보스였다. 그는 빵을 굽던 평범한 요리사였다. 올림피아 우승 이후 그리스 전역에 이름을 알리며 일약 스타가 되었으며, 지금까지도 최초의 우승자로 기억되고 있다. 당시에는 상이라고 해봐야 고작 올리브나무 잎과 가지로 만든 관이 전부였지만, 그 명성은 그야말로 불멸인 셈이다.
횟수가 거듭될수록 올림피아 제전에 참여하는 도시가 많아졌고, 마침내 그리스를 대표하는 제전이 되었다. 스타디온을 왕복하는 달리기(디아울로스), 장거리 달리기(돌리코스), 군장을 갖춘 달리기(호플리토드로모스) 등 경기 종목이 추가되면서 볼거리가 다채로워졌다. 게다가 권투, 레슬링, 격투기도 포함되었으며, 창과 원반던지기도 곁들여지더니, 5종 경기와 화려하고 웅장한 마차경기까지 열렸다. 올림피아 제전의 인기가 높아지자, 이를 모방한 범그리스 제전이 줄줄이 생겨났다. 코린토스 인근에선 포세이돈을 주신으로 이스트미아 제전이, 델피에선 아폴론을 주신으로 피티아 제전이, 네메이아에서는 제우스를 주신으로 하는 네메이아 제전이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피아 제전 사이사이에 개최되었다. 그리고 1896년 아테네에서 올림피아 제전은 세계인이 참여하는 평화의 축제로서 화려하게 부활했다.
올림피아는 그리스 여행의 필수 코스다. 이곳을 좀 더 풍부하게 즐기려면, 범그리스 4대 제전의 개최지를 모두 방문하여 비교해보는 것이 좋다. 델피는 따로 코스를 잡아야 하지만, 아테네에서 올림피아까지 가는 길엔 이스트미아와 네메이아를 차례로 들를 수 있다. 아침에 아테네에서 출발해서 1시간 정도면 이스트미아에 도착해 오전 동안 볼 수 있다. 그곳에서 다시 30분 정도 달리면 점심쯤엔 네메이아에 이른다. 네메이아를 1시간 정도 둘러본 후에 2시간30분 정도 달리면 올림피아에 도착한다. 단정한 박물관에서는 유적지에서 발굴된 다양한 유물을 볼 수가 있다. 무엇보다도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으로 받은 그리스인 청동 투구의 원형이 반갑다. 박물관을 나와 유적지로 가는 길에는 싱싱한 올리브나무가 방문객을 반긴다. 현지 그리스인 가이드에게 부탁하면 기꺼이 올리브관을 멋지게 만들어준다.
신들을 위한 장엄한 유적들
올림피아 유적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길게 뻗은 길을 사이에 두고 동쪽은 거룩하고 성스러운 지역이다. 여기에 올림피아 제전의 주신 제우스 신전과 그의 아내 헤라의 신전이 있다. 사람들의 출입을 적절히 통제하기 위한 긴 벽이 중앙의 길을 따라 세워져 있었지만, 지금은 무너져서 그 경계가 사라졌다. 북서쪽 출입문이 있던 곳으로 들어가면 곧바로 헤라 신전을 마주하게 된다. 원래는 도리아식 기둥 여섯 개가 보이고, 양 측면으로 16개가 보였지만, 지금은 40개의 기둥 중 네 개만이 온전한 모습으로 서 있고 나머지는 동강나 있거나 아예 사라졌다. 제우스 신전은 상황이 더 안 좋다. 34개의 기둥 가운데 단 하나만이 폐허 위에 우뚝 외롭게 남아 있다. 신전 안에는 그리스 최고 조각가인 페이디아스가 만든 제우스 신상이 벼락 창을 들고 앉아 있었다. 황금과 상아로 만들어진 신상은 높이가 13m였다. 피라미드와 함께 고대 세계의 ‘7대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꼽혔다.
헤라 신전 서쪽 아주 가깝게 흥미로운 유적이 있다. 원형의 건물 필리페이온인데, ‘필리포스의 신전’이라는 뜻이다.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를 위해 세워진 것으로 인간을 위한 유일한 그리스 신전이다. 로마에서는 일반적이었던 황제 신격화의 원형처럼 보인다. 당시 필리포스의 위세가 얼마나 이례적이고 대단했는지를 보여주는 유적이다. 물론 시간의 흐름은 그 위세를 전설로 만들고, 지금은 이오니아식 기둥 세 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이러한 신전들과 제단, 신상들이 군집한 성소를 둘러싼 벽 건너편 서쪽에는 따로 벽이 없었다. 선수들이 연습하는 김나시온과 팔라이스트라, 그리고 땀에 젖은 몸을 씻고 쉴 수 있는 목욕탕과 숙소가 이어져 있었다. 체육관 옆에는 신전에 필요한 것들을 제작하는 공방이 있다. 공방은 페이디아스가 거대한 제우스 신상을 제작할 수 있도록 특별히 세워졌다고 한다. 공방에 이어 커다란 숙소가 있다. 낙소스의 레오니다스가 자금을 대서 만들었다고 해서 레오니다이온이라 불린다. 이 건물들 서쪽으로 클라데오스강이 좁게 흐르는데, 레오니다이온 숙소 남쪽으로 넓게 흐르는 알페이오스강에 합류한다.
올림피아 제전에 참가한 선수들의 연습 장소인 팔라이스트라. 김헌 제공
진혼과 정화의 제의
운동경기가 열리던 스타디온은 성스러운 지역의 동쪽 끝에 있다. 마치 제우스와 헤라를 앞에 모시고 재롱잔치를 벌이듯, 최고의 인간들이 모여 기량을 겨루고 수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모양새로 자리 잡고 있다. 나중에 그 남쪽에는 마차경기를 위한 거대한 터(히포드로모스)가 닦였다. 마차경기의 도입은 올림피아의 전설적인 왕 펠롭스와 관련이 있다.
그는 이웃나라 피사의 공주 히포다미아와 결혼하길 원했다. 그러나 피사의 왕 오이노마오스는 사위에게 죽임을 당한다는 신탁을 받자, 청혼자에게 치명적인 마차경기를 제안했다. 이기면 사위가 되지만, 패하면 죽임을 당한다는 조건이었다. 왕의 말들은 포세이돈의 선물로서 그 어떤 말보다 빨랐기 때문에 어떤 청혼자도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펠롭스도 청혼을 위해선 마차경기를 해야 했다. 그런데 펠롭스를 사랑한 히포다미아는 아버지의 마차바퀴에서 청동 못을 빼고 밀랍을 채워 넣었다. 결국 마차의 바퀴는 경기 도중에 빠졌고, 오이노마오스는 마차에서 떨어져 죽었다. 신탁은 그렇게 어이없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펠롭스는 히포다미아와 결혼한 후, 장인을 추모하고 아내의 죄를 씻는 진혼과 정화의 제의로서 마차경기를 개최하였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올림피아 제전에 마차경기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펠롭스는 존경받는 왕이었다. 그를 기리기 위해 제우스 신전과 헤라 신전 사이에 그의 무덤 펠로피온이 세워질 정도였다. 펠로폰네소스반도라는 명칭도 그의 이름에서 나왔다.
달리기 경기가 벌어진 스타디온과 마차경기장 사이에 흥미로운 유적이 있다. 로마의 황제 네로의 별장이다. 로마가 그리스를 지배한 후에도 올림피아 제전은 계속되었고 로마인들도 참가했다. 올림피아 제전에 큰 관심을 가졌던 네로는 서기 67년에 마차경기에 출전했다. 10마리의 말이 끄는 화려한 마차를 탔다고 한다. 그러나 달리는 도중에 그는 그만 마차에서 떨어졌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꼴찌는 피할 수 없었다. 그런데 주최 측은 그 사고만 아니었다면 네로가 충분히 우승했을 거라면서 그에게 우승의 올리브관을 씌웠다. 네로는 당연하다는 듯이 관을 받았다니 실소를 금치 못할 일이다. 서기 393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면서 올림피아 제전을 폐지하였다.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