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원전 582년, 아폴론 신전이 있는 델피에서는 새로운 범그리스제전(Panhellenic Festival)이 열렸다. 코린토스 인근에서 이스트미아 제전이 열린 바로 다음 해였고, 올림피아 제전이 개최된 지 무려 194년이 지난 해였다. 그 전에도 델피에선 시와 노래, 춤의 경연이 열려 곳곳의 그리스인들을 불러 모으던 터였다. 델피를 품고 있는 파르나소스산에는 아홉 명의 무사(뮤즈) 여신들이 음악의 신 아폴론의 연주에 맞춰 흥겹게 춤추며 노래했다는 신화가 전해지고 있었고, 그리스인들에게 가무는 최고의 유흥이었으니, 이 제전이 매력적이었음이 틀림없다. 여기에 운동경기가 추가되고 피티아 제전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피톤이라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있었는데, 아폴론이 화살 수천발을 쏴 무찌른 것을 기념하는 뜻에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피톤의 죽음을 슬퍼하던 그의 어머니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위로하는 뜻도 있었다.
운동경기의 우승자에게는 싱싱한 월계관이 수여되었다. 거기엔 아폴론의 가슴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피톤을 물리치고 의기양양한 아폴론 앞에 에로스가 까불까불 나타났다. 어린아이 생김새인데 전통(箭筒)을 메고 활을 든 모습이 아폴론에겐 영 같잖아 보였다. “이것 봐 에로스, 활과 화살은 나 같은 어른에게나 어울리는 거야. 너 같은 꼬마에겐 위험해.” 화가 난 에로스는 앙심을 품고 아폴론에게 사랑의 황금화살을 쏘았고, 다프네라는 아름다운 소녀에게는 혐오의 납화살을 쏘았다. 순식간에 사랑의 불길에 휩싸인 아폴론이 다프네를 잡으려고 달려들자, 그녀는 기겁하며 달아났다. 몇 날 며칠 추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랑은 혐오를 이기는 법, 마침내 아폴론은 다프네를 잡았고, 그녀는 아버지에게 도와달라며 다급하게 비명을 질렀다. 순간, 다프네는 우아한 나무로 딱딱하게 변했다. 그 나무가 월계수다. 그리스말로는 그 소녀 이름 그대로 ‘다프네’다. 사랑을 이루지 못한 아폴론은 나무가 된 다프네를 영원히 자신의 나무로 삼았다. 그래서 피티아의 우승자에게는 월계관이 수여되었던 것이다.
신탁이 내리는 아폴론 신전
피티아 제전이 열린 델피의 스타디움은 해발 2500m의 파르나소스산 험한 지형을 가파르게 한참 올라가야 나타난다. 산은 초록빛보다는 짙은 회색빛 바위가 대부분이고 군데군데 먼지 풀풀 날릴 것 같은 바짝 마른 볏짚 색깔의 땅이 텁텁하게 끼여 있다. 나지막한 관목들이 바위틈을 비집고 간신히 나와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작열하는 태양을 머금은 전체적인 산 풍경은 황량하다는 느낌보다는 거친 사내의 근육처럼 씩씩해 보인다. 특히 높푸른 하늘과 하얀 뭉게구름이 멀리서부터 첩첩이 줄서서 이어져오는 험한 산세에 신묘한 생기를 돌게 한다. 아폴론 신전이 있는 산 중턱, 절벽 같은 곳에 이르면 신비로운 기운은 절정에 이른다. 거기 서 있으면 아폴론의 거룩한 목소리도, 무사 여신들이 날아와 춤을 추며 부르는 신비로운 노래도 들리는 것만 같다.
실제로 옛 그리스인들은 현재의 난제를 풀고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예언의 신 아폴론의 신탁을 듣고자 이곳으로 왔다. 아폴론은 궁술과 음악, 의술의 신이지만, 무엇보다도 태양의 신이다. 태양은 어둠을 몰아내고 세상을 환하게 비춘다. 그 찬란한 기능 때문에 아폴론은 신탁과 예언의 신에 가장 어울린다. 내가 과거에 저지른 일이 어떤 결과를 냈는지, 지금 내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앞으로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를 때, 사람들은 깜깜한 어둠을 헤매는 것 같다고 느낀다. 그 갑갑함을 풀어줄 신탁을 내릴 때, 그것은 마치 어둠을 비추는 태양과 같을 것이다. 그런 찬란함을 기대하고 예로부터 사람들은 아폴론 신전이 있는 델피를 찾았던 것이다.
페르시아와 일전을 앞둔 리디아의 크로이소스 왕도,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승리를 거둘 비법을 모색하던 아테네의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도,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고 싶었던 소크라테스도, 친부모가 누구인지 간절히 찾던 신화 속 오이디푸스도 이곳에서 혜안을 얻으려고 찾아왔다. 그들이 왜 델피를 찾았는지, 이곳 아폴론 신전 터에 서서 온몸으로 파르나소스산의 기운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폴론의 여사제에게서 신탁을 듣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몇 달씩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헛된 것이 아니었다. 신탁은 난제를 푸는 열쇠가 되기도 했지만, 기다리는 동안 그리스는 물론 그리스 바깥 세계 곳곳에서 찾아온 사람들끼리 서로 나누는 정보들의 쓸모가 그 자체로 쏠쏠했다. 통신망이 넓게 퍼져 빠르게 작동하는 요즘과는 완전히 딴판이던 그때,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 자체가 고급 정보 교환의 귀중한 기회였다. 그곳에서 얻은 정보는 신탁보다 더 유용했던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오래 기다리는 동안, 사람들은 연극도 관람하고 노래와 시를 즐기며 운동도 했던 것인데, 이와 같은 기존의 인프라를 바탕으로 그리스 각처의 사람들을 불러모아 정기적인 범그리스 제전으로 발전시킨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 아라호바 마을의 전경. 김헌 제공
델피는 안 가도 아라호바는 간다
아테네에서 차로 2시간30분쯤 달리면 델피에 도착한다. 델피에 이르기 전, 파르나소스산의 남쪽 비탈에 아라호바라는 아름다운 마을이 있다. 유럽인들에게는 스키를 즐기는 겨울철 명소지만, 우리에겐 드라마 <태양의 후예>로 알려진 곳이다. ‘송송 커플’이 석양을 배경으로 달콤한 입맞춤을 나누며 사랑을 확인하던 시계탑 장면 때문인데, 그 뒤 한국과 중국 등지에서 관광객들이 델피는 안 가도 아라호바는 간다는 생각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아라호바를 지나 5분이면 델피에 도착한다. 델피 박물관으로부터 다양한 부속 건물들을 지그재그로 올라가다 보면, ‘옴팔로스’라는 삼각뿔 돌덩이를 볼 수 있다. 옴팔로스는 ‘배꼽’을 가리키는데, 돌이 세워져 있는 그곳이 세상의 배꼽, 정중앙이라는 뜻이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가 자식이 태어나는 족족 잡아먹자, 그의 아내 레아는 제우스가 태어났을 때, 이 돌을 아이라며 강보에 싸서 주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무사히 빼돌려져 자라난 제우스는 아버지를 몰아내고 세계의 지배자가 되자, 돌에게 감사하는 뜻으로 세상의 중심을 나타내는 지표로 삼았다. 옴팔로스를 지나면 페르시아의 침략을 무찌르도록 신탁을 내려준 아폴론에게 아테네인들이 봉헌한 보물창고가 나오고, 파르나소스산의 위압적인 형세를 감탄할 수 있는 자리에 이르면 아폴론 신전이 나타난다. 아폴론이 피톤을 죽여 그 시신을 이 신전 아래 묻었다는 전설이 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신성한 길’은 일종의 계단을 이루는데, 아폴론 신전 다음 계단에는 극장이 세워져 있고, 거기서도 한참을 돌아 오르다 보면 마침내 피티아 제전을 위한 스타디움이 나타난다. 그리스인들은 이 파르나소스산이 인간들이 이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산이라고 생각했으니, 피티아 제전은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벌어진 스포츠 제전인 셈이다. 그러나 로마가 그리스를 정복하고 기독교가 로마를 지배하자, 아폴론을 주신으로 하는 피티아 제전은 불경스러운 이교도의 행사로 찍혀 폐지되었다.
근대 올림픽 게임이 부활했듯이, 피티아 제전을 부활시키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1927년에 제1회 근대 델픽 게임이 열렸다. 그 뒤 지속되지 못하다가, 2004년에 아이오시(IOC·국제올림픽위원회)에 상응하는 아이디시(IDC·국제델픽위원회)가 조직되어 피티아 제전의 부활을 시도했다. 이름은 델픽 제전이라고 바꾸고, 운동경기 중심의 올림픽 대회와 차별성을 두기 위해 문화와 예술의 제전으로 특화되었다. 우리나라는 2009년에 제주에서 제3회 델픽 제전을 개최했다. 일주일 동안 열린 이 제전에 54개국에서 1500여 명의 문화예술인들이 참가했다.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을까? 제5회 대회가 인도에서 열렸다는 소식 이후, 아이디시 누리집에는 더 이상의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 아폴론 신이 자신의 제전에 대해 더는 관심을 갖지 않는 걸까?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