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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품위 없이 다정한 시대에

등록 2020-05-29 06:01수정 2020-05-29 09:13

[책&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좋은 곳에 갈 거예요
김소형 지음/아침달(2020)

시는 분명 말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때 ‘말’은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한 것과는 다른 질감의 것을 이른다. 이를테면 보통의 논리로는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말, 아직 말이 되기도 전에 엉뚱한 방향으로 자꾸만 달아나려는 감정의 파고, 다른 이와의 관계에서 발아했더라도 막상 그 자리에서는 꺼내기 쉽지 않은 (그래서인지 잘 사라지지 않는) 한 사람의 내밀한 마음 같은 게 모여 특정한 시선이나 소리의 형태를 갖추면서 드러나는 것에 가깝다. 문학 연구자들의 많은 논의가 있어왔지만 여전히 시와 현실이 어떻게 연결되는지 가늠하기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의 어지간한 형태로 나타나기 쉽지 않은 말이 유독 시로 등장할 수 있다는 얘기는 역으로 현실로부터 발원하지 않는 시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 누구도 다 안다고 단언할 수 없는 현실의 일부가 예술의 재현적 속성에 기댄 채 특정한 꼴을 하고 다른 이들에게 가 닿을 때, 그 무엇도 찬탈하지 못하는 고유한 삶이 거기에 있음이 드러난다. 때때로 우리가 어떤 시 앞에서 막막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무엇과도 교체할 수 없는, ‘살아 있는(살아 있던) 누군가’를 진정으로 생생하게 받아들이는 일의 만만치 않음에 직면했기 때문일 것이다.

자꾸만 무언가를 얻고자 하면서도 정작 거기에서 빠져나간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리는 이 앞에서 “까마득한” 표정을 지을 줄 아는 김소형의 시를 읽다가 문득, 인간의 ‘품위 일반’보다는 바로 이 순간의 고유한 품위가 무엇인지를 상기하는 시의 태도가 무엇을 지켜내는지 알 것만 같았다. 김소형 시의 일부분을 읽는다.

“창과 빛 아래서/ 신을 찾는 네가/ 신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건 신만이 아시겠지/ 그건 신도 모를 일이다// 떠들었을 때// 나는 네가 찾는 신이 될 수도 있고/ 영혼을 수집하는/ 빛이 될 수도 있었겠지// 빛의 태피스트리를/ 보던 너의 얼굴이/ 다 해지고/ 물결을 짜던 나비의 사체가/ 가라앉을 때쯤// 창문과 빛에서/ 도망갈 수도 있었을 테고// 여전히 떠들고 있는/ 네 육체를 보며// 창문과 빛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듯/ 침묵한다// 저 빛에는 그림자가 있고/ 저 바람에는 등잔이 있고/ 저 창문에는 신의 궁륭이 있고/ 그곳에서 우리는 인간의 품위를/ 지킬 수도 있었겠지//(중략)// 품위가 우리 곁에서/ 잠시 사라진 것이라고 말하려는/ 나에게/ 너는 그것을 찾게 되면/ 알려달라고 말했다// 그것은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이라고// 창가에 앉아/ 창과 빛이 있으면/ 그만 사라질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하는 너를 보며 다정하고/ 까마득하게 웃을 뿐이었다”(김소형 시집 <좋은 곳에 갈 거예요> 중 ‘품위 없이 다정한 시대에서’ 부분).

“너”는 아마도 “나”의 “다정한” 웃음에 깃든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렇다고 “나”는 “너”의 앞에 놓인 “나”의 자리를 떠나진 않을 것이다. 다만, 생각해보자는 것. “네가” 신도 모를 일에 대해 맘껏 얘기하는 “창과 빛 아래서”, 네 생각과 다른 숱한 가능성을 헤아리는 누군가가 거기에 있다는 것. 헤아리지 못할 것만 같은 그 부분을 소중히 여기는 노력 속에서 인간의 품위란 유지될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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