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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스트미아 우승자여, 불멸의 명성을 얻으리라

등록 2020-05-15 06:00수정 2020-05-15 09:27

신화와 축제의 땅, 김헌의 그리스 기행
④ 4대 범그리스 제전(1): 이스트미아 제전

4월과 5월 사이 2년마다 이스트미아에서 열린 그리스인들의 스포츠 제전
바다의 신 포세이돈 모신 신전 아래 최고 영웅의 자리 두고 치열한 경쟁

올림픽 경기는 1896년 아테네에서 첫 대회가 개최된 이래 4년마다 열리는 세계인의 축제다. 이때만큼은 갈등도 뒤로하고 평화의 염원을 한껏 드러낸다. 안타깝게도 금년에 예정되었던 도쿄 올림픽은 코로나19의 확산 때문에 내년으로 연기되었다. 도쿄는 1940년에도 올림픽 개최지였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문에 열리지 못했다. 부디 세계가 코로나 감염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서 내년에는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함께 모이면 좋겠다.

현대 올림픽 경기의 뿌리는 기원전 776년에 처음 열린 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 제전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4년마다 개최되었다. 산과 섬이 많았던 탓에 그리스는 오랫동안 하나의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했다. 대신 도시(폴리스)가 하나의 국가처럼 정치 주체였고, 수백 개의 ‘도시국가’가 그리스 세계를 이루며 역사를 이어왔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그들은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신을 섬긴다는 점에서 ‘하나의 공동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일단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을 ‘바르바로스’라 부르면서 타자화한 것이 명백한 증거다. 트로이아로 납치된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구하려고 그리스의 수많은 나라가 연합군을 구성해 에게해를 건너가 소아시아 땅을 공격했던 ‘트로이아 전쟁’의 전설도 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끈이었다. 그리스인들에게 연대감을 불어넣어준 가장 구체적이고 오래된 전통은 바로 올림피아 제전이었다.

올림피아 제전은 ‘모든 그리스인들이 모이는’(Panhellenic) 축제였다. 이 기간 동안 그리스의 도시들은 전쟁도 멈추고 한곳에 모여 평화와 공존을 기원하는 축제를 즐겼다. 올림피아 제전이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고 그리스 전역에서 권위를 인정받자, 다른 도시들도 비슷한 축제를 만들었다. 먼저 제49회 올림피아 제전 직후인 기원전 583년에 코린토스는 이스트미아 제전을 열었다. 이에 뒤질세라 델피는 그 이듬해에 피티아 제전을 열어 4년 주기를 취했다. 그러자 그다음 해에 또다시 이스트미아 제전이 개최되면서 2년마다 열리는 대회로 자리를 잡았다. 이로써 2년마다 올림피아 제전과 피티아 제전이 번갈아가며 개최되고, 그사이 2년마다 이스트미아 제전이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기원전 573년부터는 이스트미아 제전이 열리는 해에 맞춰 네메이아 제전이 2년마다 열렸다. 결국 그리스인들은 1년에 적어도 한 번씩 범그리스 제전으로 모일 수 있게 되었다.

이스트미아의 포세이돈 신전 터. 김헌 제공
이스트미아의 포세이돈 신전 터. 김헌 제공

아테네가 정치적 계산으로 꾸며낸 전설

그 가운데에서도 4월에서 5월 사이 이맘때 그리스인들은 2년마다 이스트미아에 모여 봄철 스포츠 제전을 즐겼다. 같은 해마다 열리던 네메이아 제전은 대회가 겹치는 것을 피하고자 7월과 8월 사이 가을 제전으로 치러졌다. 대회를 개최한 코린토스는 발칸반도 남단의 그리스 본토와 그로부터 남서쪽으로 공룡의 발자국처럼 뻗어나간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지협 끝에 위치한 도시였다. 시시포스가 이 도시를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그는 영리한 꾀를 부려 신들을 자주 속였기 때문에 신들의 미움을 샀다. 저승에서는 커다란 바위를 산 정상에 밀어 올리는 벌을 받았다. 그러나 안간힘을 써서 정상에 올려놓은 바위는 다시 산 아래로 굴러떨어지기 때문에 그의 형벌은 영원히 계속된다. 그의 이름은 고된 벌을 수행하며 내뿜는 가쁜 숨 ‘시-시-포-스’와 깊은 연관이 있는 셈이다. 바로 이 시시포스가 이스트미아 제전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정은 이렇다.

제우스가 세멜레와 몰래 동침하여 디오니소스를 낳았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고 화가 난 헤라는 갓난아이를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아이의 이모였던 이노가 아이를 빼돌려 키우자, 헤라는 앙심을 품고 이노와 그의 아들 멜리케르테스를 바다에 빠져 죽게 만들었다. 돌고래 한 마리가 나타나 아이의 시신을 등에 태워 이스트미아 해변 소나무 숲에 갖다 놓았다. 우연히 그곳을 지나던 시시포스가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치러주고 그 넋을 위로하는 제전을 열었다. 이것이 바로 이스트미아 제전이다. 나중에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이 제전을 성대하게 확장하여 자신의 아버지였던 포세이돈 신에게 바쳤다고 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일까? 물론 아니다. 스파르타와 함께 그리스 세계를 양분하던 아테네가 정치적 계산으로 꾸며낸 전설이요, 신화라고 보는 것이 좋다. 즉, 스파르타의 전통적인 영웅 헤라클레스가 올림피아 제전의 상징적인 영웅이었던 것에 대응하기 위해 아테네는 이스트미아 제전을 전략적으로 지원했고 그 상징적 인물로 자신들의 영웅 테세우스를 갖다 붙인 것이다.

대회가 열린 이스트미아는 코린토스로부터 차로 약 15분쯤, 아테네에서는 약 1시간쯤이면 도착하는데, 1893년에 완성된 코린토스 운하의 남쪽 끝에 있다. 그곳 해안에는 에게해로 열린 항구가 있고, 항해의 안위를 빌기 위한, 거대한 포세이돈 신전이 세워졌다. 지금은 그저 기둥과 벽의 흔적만 간신히 남아 있지만, 그곳은 에게해가 시원스럽게 내려다보이고 거대한 산세가 두르고 있어 터가 참 좋다는 걸 누구나 단박에 느낄 수 있다. 해안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고 있노라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입김이 전해져 오는 듯하다. 포세이돈을 모시고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는 신전을 짓기에는 천하의 명당이다. 신전 아래쪽에는 육상경기가 벌어졌던 최초의 스타디움이 있었는데, 지금은 출발선 부근만 남아 있고 길게 뻗은 주로(走路)의 일부는 새로 깔린 도로 아래 묻혀 있다. 그 도로 너머에 나중에 새로 생긴 스타디움이 있다.

멜리케르테스와 이노의 조각상. 김헌 제공
멜리케르테스와 이노의 조각상. 김헌 제공

영원히 빛나는 트로이아의 영웅처럼

대회에서 우승한 사람에게는 그 지역에서 많이 자라는 소나무로 만든 관(冠)이 주어졌다. 그 자체로는 별것 없는 소박한 상이지만, 그것을 쓴 선수의 명예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값진 것이었다. 마치 전쟁터에서 적을 무찌르고 개선하는 전사처럼 경기장에서 그는 관중들이 외쳐대는 환호의 대상이었고, 출신 도시국가로 돌아가면 영웅처럼 시민들의 추앙을 받았으며, 가문에는 크나큰 영광이요 자랑거리였다. 국가는 그에게 푸짐한 포상금을 지급했고 시민들은 아낌없이 존경을 표했으며, 시인들은 온갖 솜씨를 다해 웅장한 찬가를 지어 바쳤다. 대표적인 시인이 핀다로스다. “오 멜리소스, 이스트미아 제전에서 그대가 훌륭한 투지를 보여줬으니/ 신들이 나에게 허락하신, 모든 곳에 열려 있는 수만의 길을 따라가며,/ 그대 가문의 탁월함을 찬양하리다.”(이스트미아 찬가 4) 당시 ‘멜리소스’는 아킬레우스나 오디세우스처럼 호메로스의 서사시로 영원히 빛나는 트로이아의 영웅들과 다를 바 없다.

코린토스에 머물며 기독교를 가르쳤던 바울도 이스트미아 제전을 관람했다. 그 경험이 무척 인상적이었나 보다. 나중에 코린토스의 교인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스트미아 경기를 예로 들었을 정도다. “운동장에서 모든 달리기 선수들이 달리지만 상을 받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임을 여러분도 아시지 않습니까? 여러분도 상을 받도록 그렇게 달리십시오.” 그의 조언은 이스트미아 경기에 참여한 달리기와 격투기 선수를 빗대어 이어진다. “나는 방향을 잃고 달리지 않으며, 허공을 치는 것같이 싸우지 않습니다.” 이스트미아 경기에 익숙한 코린토스 사람들에게 삶의 자세를 말할 때, 이보다 더 효과적인 비유는 없을 것이다.

한편 그는 우승자들이 고작 소나무 관을 쓰는 것이 허망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썩을 승리의 관을 얻고자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것을 얻고자 합니다.” 신앙의 대가로 주어진 영원한 천국의 소망을 강조했던 것이지만, 이스트미아의 선수들의 바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썩을 소나무 관이 아니라 썩지 않을 불멸의 명성을 얻으려고 했고, 그것은 기독교의 천국에 버금가는 영원한 대가였을 테니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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