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엘레우시스 미스터리 속 생명과 부활의 이야기

등록 2020-04-24 06:00수정 2020-04-24 10:50

신화와 축제의 땅, 김헌의 그리스 기행
③ 저승으로 가는 길, 엘레우시스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를 위한 제물을 바쳤던 8일간의 엘레우시스 밀교의식
참가자들은 그곳에서 몸을 씻고 풍요를 기원하고 새로운 삶을 결심했으리라

저승으로 통하는 플루토니온이 보이는 언덕의 풍경. 김헌 제공
저승으로 통하는 플루토니온이 보이는 언덕의 풍경. 김헌 제공

옛 그리스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지하세계로 간다고 믿었다. 그곳으로 통하는 입구에 저승의 신 하데스를 위한 신전, ‘플루토니온’이 세워졌다. 하데스의 다른 이름은 플루톤이라고 부른다.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만드는 플루토늄의 명칭도 바로 이 죽음의 신 플루톤의 이름에서 나왔다. 아테네인들은 엘레우시스에 저승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고 믿고, 그곳에다 플루토니온을 지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2500여년 전 일이다. 그곳으로 가보자.

아테네에서 차를 타고 20분 정도 서쪽으로 가다 보면 바다가 보인다. 바다 건너 큰 섬이 병풍처럼 또렷하다. 살라미스섬이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가 아테네를 침략했을 때, 아테네인들은 자신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페르시아 함대를 좁은 해협으로 유인하여 완벽하게 박살냈다. 이 전투를 섬의 이름을 따서 ‘살라미스 해전’이라고 한다. 이 승리를 기점으로 아테네는 군사적 강국으로 부상하고, 주변 도시국가들을 모아 델로스 동맹을 결성한 뒤, 제국의 면모를 갖춰 나갔다. 문화적 융성기를 맞이한 것도 바로 이때다.

살라미스섬을 바라보며 해안선을 따라 15분쯤 북쪽으로 가면, 엘레우시스 유적지에 도착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무너진 기둥과 건물의 돌무더기가 야트막하게 쌓인 사이로 길이 나 있다. 그 길의 끄트머리에 작은 언덕과 움푹 파인 동굴이 한눈에 보인다. 거기가 바로 플루토니온이다. 예전에는 신전 건물이 있었겠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가까이 가서 보면 동굴이라기보다는 움푹 팬 홈에 가깝다. 우리가 죽는 순간 몸을 빠져나간 혼백이 스며들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통로가 있을지도 모른다.

데메테르 여신의 기쁨과 슬픔

플루토니온은 계절을 만드는 곳이다. 그곳에서 봄이 시작되고 여름이 저물며, 낙엽이 지고 겨울이 시작된다. 계절의 변화를 만드는 이는 ‘대지(Dē)의 어머니(Mētēr)’라는 뜻의 데메테르 여신이다. 그녀에게는 페르세포네라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딸이 있었다. 모녀가 함께 사는 동안, 세상은 언제나 화사하고 따뜻한 봄날이었다.

어느 날, 저승의 신 하데스가 땅 위로 나왔다가 페르세포네에게 반했다. 하데스는 그녀를 거칠게 끌어당겨 마차에 태운 다음, 땅속으로 내려가 버렸다. 겁에 질린 딸의 날카로운 비명을 들은 데메테르는 하던 일을 멈추고 미친 듯이 딸을 찾아 헤맸다. 땅은 메말라가고 황폐해졌으며 꽁꽁 얼어붙기 시작했다.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장면을 표현한 조각상. 김헌 제공
하데스가 페르세포네를 납치하는 장면을 표현한 조각상. 김헌 제공

식량을 얻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고, 마침내 제우스가 사태 해결에 나섰다. 하데스와 데메테르를 올림포스 궁전으로 불렀다. 페르세포네를 아내로 삼은 하데스도, 딸을 되찾으려는 데메테르도 팽팽하게 맞섰다. 제우스는 중재안을 내놓았다. 페르세포네가 1년의 반은 저승세계에서 하데스와 머물고, 나머지 반은 데메테르와 지상에서 보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둘의 합의에 따라 페르세포네가 저승에서 지상으로 올라오는 곳이 바로 엘레우시스의 동굴, 플루토니온이었다. 그곳에서 오매불망 딸을 기다리던 데메테르가 딸을 만나면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그 눈물이 땅에 떨어지면 얼어붙었던 땅이 녹아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나며 봄이 시작된다. 모녀가 행복하게 대지를 누비는 동안, 온갖 식물은 찬란하게 피어나 탐스럽게 무르익고, 풍요로운 열매를 주렁주렁 맺는다.

그렇게 1년의 반이 생명의 환희 속에 지나가면, 이별의 시간이 다가온다. 페르세포네는 다시 저승으로 들어가야 한다. 헤어짐은 데메테르의 마음에 찢어지는 슬픔을 불러일으키고, 그녀가 흘린 이별의 눈물은 땅에 닿는 순간 대지를 온통 얼어붙게 만든다. 풀은 시들고, 나뭇잎은 빛을 잃어 바랜 낙엽으로 떨어져, 나무는 앙상한 가지만 남는다. 찬바람 부는 겨울의 황량한 대지는 데메테르의 우울 때문이다. 페르세포네가 다시 올라올 때까지, 세상은 꽁꽁 얼어붙어 죽은 듯이 잠들어 있을 터이다.

바로 이곳에서 페르세포네는 하데스(플루톤)의 아들 플루투스를 낳았다. 플루투스는 풍요의 신이다. 가을이 깊어 갈 무렵 땅속으로 들어갔다가 봄에 다시 나오는 페르세포네가 풍요의 신을 낳았다는 것은, 가을에 뿌려진 씨가 겨울을 이겨내고 봄에 솟아나 풍성하게 결실하는 그리스 농사일을 그려낸 신화다.

불신의 죄를 씻으라는 명령

플루토니온이 있는 언덕을 오른쪽으로 두고 완만한 경사를 올라가면, 넓은 터가 시야를 채운다. 거기에 데메테르의 신전이 있었다. 야트막한 언덕을 뒤에 두고 전면에 바다가 내다보이는, 배산임수의 기가 막힌 명당이다. 지금은 기둥 하나 제대로 없고, 오직 건물의 얕은 흔적만 남아 있는 빈터지만, 그 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곧 우아한 신전이 머릿속에 세워질 것이다.

이 신전은 엘레우시스의 왕 켈레오스가 지었다고 한다. 데메테르가 노파로 변신하여 딸을 찾아 방황하다가 마침내 엘레우시스에 왔을 때, 켈레오스 왕과 왕비는 그녀를 대접했다. 데메테르는 고마운 마음에 그들의 아들을 불멸의 존재로 만들어주려고 했다. 밤에 몰래 아이를 불 속에 넣어 정금(正金)처럼 단단하게 만들려고 했으나, 이를 발견한 왕비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일을 그르쳤다. 화가 난 데메테르는 본래 모습을 드러낸 뒤, 자신을 위한 신전을 짓고 불신의 죄를 씻으라고 명령했다. 켈레오스 부부는 신전을 세워 데메테르를 모셨으며 정화의 의식을 거행했다. 만족한 데메테르는 페르세포네가 플루토니온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올 때 이곳에 주로 머물렀다고 한다.

그 이후 엘레우시스에서는 켈레오스 부부가 거행한 정화의 제의를 밀교의식의 형태로 계승했다고 한다. 아테네가 엘레우시스를 합병한 뒤에는 축제의 주도권마저 가져갔지만, 밀교의식의 집행만은 엘레우시스 왕족 출신 사제들의 몫이었다. 봄이 되면 아테네인들은 페르세포네를 맞이하는 안테스테리아라는 축제를 아테네 근교에서 별도로 거행했지만, 가을에 페르세포네를 지하로 보내는 제의를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 엘레우시스의 밀교의식을 자신들의 것으로 삼고 싶어 했다. 이 두 밀교의식을 연결시키려고 아테네인들은 아고라와 아크로폴리스 사이에 엘레우시니온이라는 신전을 세웠다.

저승의 신 하데스를 위한 신전 플루토니온. 김헌 제공
저승의 신 하데스를 위한 신전 플루토니온. 김헌 제공

장엄하면서도 유쾌한 축제의 행렬

엘레우시스 밀교의식은 8일 동안 지속되었다. 의식이 시작되기 이틀 전, 아테네인들은 엘레우시스의 여사제들을 통해 데메테르 여신의 성물을 담은 원형 상자를 아테네로 가져왔다. 축제는 추석의 보름달이 뜨는 밤에 시작되었는데, 먼저 밀교의식에 참가할 사람들의 신청을 받았다. 참가비는 15드라크마 정도였다. 당시 아테네 노동자의 보름치 급료였다고 하니 적지 않은 돈이다. 둘째 날부터 정화 의식이 거행되었다. 참가자들은 여신들에게 바칠 아기 돼지를 들고 아테네 인근 항구까지 행진한다. 바닷물로 깨끗이 씻은 돼지는 엘레우시니온에서 신들에게 바쳐진다. 참가자들은 돼지피를 온몸에 뿌리며 자신의 죄를 씻고, 신전에 머물면서 경건한 시간을 보낸다.

다섯째 날이 되면, 엘레우시니온에 보관되었던 데메테르 여신의 성물을 다시 엘레우시스로 옮기는 성대한 행진을 한다. 디오니소스 신의 분장을 한 소년이 행렬을 이끈다.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악단이 행렬에 힘을 불어넣으며, 밀교의식 참가자들이 그 뒤를 따른다. 말과 나귀도 눈에 띄고, 길가에는 구경꾼들이 몰려들어 환호성을 지른다. 그야말로 축제의 절정이다. 아테네에서 엘레우시스까지 장엄하면서도 유쾌한 행렬이 하루 종일 이어지는 것이다. 그다음 날부터 엘레우시스 밀교의식이 거행된다. 그리스 말로 ‘미스테리아’(Mysteria)라고 하는데,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의식이 끝난 뒤 발설하면 엄한 처벌을 받는다. 그래서 그 내용도 그야말로 ‘미스터리’다. 분명한 것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풍요를 기원하며, 자신을 되돌아보고 깨끗하게 마음을 다짐으로써, 새로운 삶을 결심했으리라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63살 데미 무어의 세월을 질투하다 1.

63살 데미 무어의 세월을 질투하다

천주교·불교 신속한 내란 비판...최대 개신교 조직 한국교총은 ‘침묵’ 2.

천주교·불교 신속한 내란 비판...최대 개신교 조직 한국교총은 ‘침묵’

영화인들 “‘내란 공범’ 유인촌의 영진위 위원 선임 철회하라” 3.

영화인들 “‘내란 공범’ 유인촌의 영진위 위원 선임 철회하라

[단독] 배우 이영애, 연극 ‘헤다 가블러’로 21년만에 연극 무대 복귀 4.

[단독] 배우 이영애, 연극 ‘헤다 가블러’로 21년만에 연극 무대 복귀

송중기, 재혼+임신 동시발표…아내는 영국 배우 출신 케이티 5.

송중기, 재혼+임신 동시발표…아내는 영국 배우 출신 케이티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