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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그들이 절규할 때, 우리는 듣지 못했다

등록 2020-04-10 06:01수정 2020-06-08 14:29

사랑받으려는 욕망 지녔다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우리와 같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약하게 뛰는 심장박동 포착하는 것이 문학의 권능
⑭ 우리가 바라보면서도 외면하는 메시지들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중 한 장면. <여권의 옹호>를 쓴 페미니스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이기도 한 메리 셸리가, 엄마의 무덤 앞에서 홀로 글을 쓰는 장면. ⓒ ㈜팝엔터테인먼트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중 한 장면. <여권의 옹호>를 쓴 페미니스트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딸이기도 한 메리 셸리가, 엄마의 무덤 앞에서 홀로 글을 쓰는 장면. ⓒ ㈜팝엔터테인먼트

[책&생각] 정여울의 문학이 필요한 시간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말하고 있는데,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다. 고통받는 이가 제대로 말할 수 없다면, 표정으로, 눈으로, 몸짓으로, 모든 수단을 동원해 표현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듣지 못한다. 대답할 수 있는 질문만을 듣고, 곤란하지 않은 정보들만 섭취하는 사람들은 아픔을 공기처럼 들이마시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의 곤경에 무심하다. 오랫동안 이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힘들었다. 인간에게는 ‘필사적 외면’이라는 본능이 있다는 것을. ‘의도적 냉혹’이라는 본능도 있다는 것을. 그것도 모자라 타인이 괴로워하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며 짜릿한 쾌감을 느끼는 사람들까지 있다는 것을. 자기보다 약한 이들을 상습적으로 학대하고, 누군가가 괴로워하는 것을 돈까지 내며 엿보고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언제든 괴롭히기 좋은 ‘다음 먹잇감’을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다. 문학은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인간의 이 어두운 본능에 대처한다. 타인의 인격을 파괴하는 인간의 그 어두운 본능을 낱낱이 폭로하거나, 그들과 싸우며 하루하루 전쟁을 치러내는 전사들을 옹호하는 것이다. <레미제라블>이나 <전쟁과 평화> 같은 작품들이 바로 그 두 가지 길을 동시에 보여준다.

‘가만히 곁에 있어 주기’의 힘

그런데 이런 선명한 ‘폭로’나 ‘옹호’의 길 외에도, ‘아파하는 그들 곁에 가만히 함께 있어 주는 길’이 있다. 지금 당장 혁명이나 치유가 불가능할지라도. 다만 아파하는 사람들 곁에 가만히 함께 있는 것. 나는 문학의 진정한 힘이 거기에 있다고 믿는다. 종교의 힘도 가족의 힘도 사랑의 힘도 빌릴 수 없는 상황에 맞닥뜨릴 때, 나는 문학의 그런 ‘가만히 곁에 있어 주기’의 힘으로 버틴 나날이 많았다. 최근에는 권여선의 단편 ‘손톱’을 읽으며 그런 문학의 힘을 발견했다. 고통받는 타인의 인생을 바꿀 수 없을지라도, 그의 아픔을 당장 위로할 수 없을지라도, 다만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 용기. 그것은 단지 작가적 재능의 문제가 아니다.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다. 아름다운 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삶을 향해 존재를 던져야만 나올 수 있는 글이 있다. ‘손톱’을 읽고 있으면 작가가 고통받는 누군가의 곁에 오래오래 머물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야만 이렇게 쓸 수 있다는 것을, 독자는 온몸으로 느낀다. 권여선 작가는 ‘손톱’의 주인공 소희 곁에 가만히 있어 준다. 신발 매장에서 일하는 소희가 손톱이 뒤집어지는 고통을 참으면서, 병원비 몇만원을 아끼기 위해 치료를 포기하는 모습. 손톱 따위 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엄마랑 언니가 자기를 버렸음에도 잘 살 수 있다며 자신을 몰아세우는 모습은 너무 가슴이 아파서 차마 다음 페이지를 넘기기가 겁난다. 고통받는 사람 곁에 있어야만 보이는 것들, 그것은 예컨대 맞춤법이 틀린 오래된 문자메시지를 발견하는 순간 같은 것이다. 소희의 언니가 자기들을 버리고 떠난 엄마에게 보낸 문자메시지는 읽을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엄마 전화 좀 받아 무슨 일 있어 나랑 얘기 좀 해 얘기를 해야 무슨 일 있는지 내가 알지 돈은 괜찮아 누구 꼬드김에 빠져서 날렸으면 어때 엄마가 다 써버렸으면 부득이한 사정이 있었다고 생각하께 그게 나도 돈 벌고 엄마도 돈 벌고 둘이 벌으니까 금방 갚으면 되잖아 나는 괜찮은데 엄마 소희는 아직 어리잖아 애처럽잖아 인제 중학교에도 가야 되잖아 엄마 소희가 기다려 이 문자 보면 꼭 연락해.” 도망친 엄마에게 보내는 소희의 메시지에는 절망적인 에스오에스(SOS)신호가 숨겨져 있다. ‘엄마, 제발 우리를 버리지 마, 빚더미에 눌려 살더라도, 우리 제발 같이 있자’라는. 하지만 엄마에게 이런 절박한 구조신호를 보낸 언니조차 어린 동생 소희가 평생 피땀 흘려 모은 돈을 챙겨 도망가버린다. 엄마처럼 잔인하게, 소희에게 빚을 남긴 채. 소희는 그 빚을 갚기 위해 짬뽕 한 그릇 마음대로 먹지 못하고, 주린 배를 움켜쥔 채 간신히 하루하루 버텨내고, 일터에서는 ‘매가리 없는 애’라는 평판을 듣는다. 나는 소리치고 싶었다. 소희는 ‘매가리 없는 아이’가 아니라 ‘그 빛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이’라고. 당신들이 소희의 아름다움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당신들의 무심함과 냉혹함 때문이라고. 아무도 소희의 쓰라린 배고픔과 참을 수 없는 외로움을 눈치채지 못한다. 짐작하면서도 외면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두들 바쁘다며, 내 인생만으로도 버겁다며 외면하고, 내버리고, 무시하는 ‘소희들’이 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을까.

소희의 꿈은 달리기였다. 웬만한 남자아이들은 상대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달리기를 잘했던 소희의 재능을 알아보고 육상을 권하는 선생님이 있었지만, 엄마는 ‘돈이 든다’는 이유로 아이를 주저앉힌다. 소희의 그 짓밟힌 꿈이 못내 아프다. 달리기를 할 수 있었더라면, 그저 소희를 달리게만 해주었다면, 이토록 외롭지도, 이토록 무력하지도 않을 텐데.

언니와 소희의 음성은 때로 구분이 되지 않는다. 알고 보면 소희를 떠난 언니도, 소희처럼 엄마에게 버려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엄마 니가 사람이냐 혼자만 잘 먹고 잘 살려고 얼마나 준비를 했냐 그게 언제부터 했냐 얼마 동안 했냐 인제 내가 가만히 있을 줄 아냐 무슨 수를 써도 내가 내 돈 돌려받고 만다 엄마 니가 대출 그거만 사기 친 게 아니고 집도 보증금 그렇게 빼먹고 폰도 싹 다 바꾸고 그러고도 니가 엄마냐 내가 어떻게 사는지 아냐 이 나쁜 년아 내가 미치겠다 소희년땜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내가 아직도 빚 갚고 있다고 쌍년아 인제 나도 막 나갈 거라고 막 막 살 거라고” 언니처럼 막 살겠다고 결심하지도 못하는 소희는, 언니처럼 엄마를 ‘쌍년아’라고 부르지도 못하는 소희는, 다만 자신을 학대함으로써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버텨야 했다.

휴대전화 매장에서 만난 할머니는 소희의 손톱이 뒤집어진 모습을 보고 걱정해준다. 자신을 나무라거나 자신에게 매정한 사람들밖에 본 적 없는 소희는,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위로의 말, 걱정의 말을 듣자 가슴 한구석이 무너져내린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버림받은 기분으로 살아가는 소희는 휴대폰 매장에서 무료로 나누어주는 사탕을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사다리처럼 알뜰히 활용하는 낯선 할머니에게 느닷없는 따스함을 느낀다. 진통제 기운이 떨어졌는지 손톱이 쿡쿡 쑤시지만, 조금이라도 더 낯선 할머니의 온기를 느끼고 싶은 소희는 이 아름다운 휴일,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 따스한 낯선 사람의 친절을 느껴보고 싶어 그곳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다. 작가는 홀로 아파하는 소희의 곁에 다만 함께함으로써, 이토록 절절한 이야기의 숲을 일구어낸다.

영화 &lt;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gt; 갈무리. 메리 셸리가 소설 안에서 만들어 낸 괴물은 지독한 단절감을 견디다 못해 ‘나와 똑같은 괴물’을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창조주를 향해 울부짖는다. ⓒ ㈜팝엔터테인먼트
영화 <메리 셸리: 프랑켄슈타인의 탄생> 갈무리. 메리 셸리가 소설 안에서 만들어 낸 괴물은 지독한 단절감을 견디다 못해 ‘나와 똑같은 괴물’을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창조주를 향해 울부짖는다. ⓒ ㈜팝엔터테인먼트

나 닮은 괴물이라도 하나 있다면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서 지독한 단절감을 견디다 못한 괴물은 자신을 빚어낸 창조주를 향해 ‘나와 똑같은 괴물’을 하나 더 만들어달라고 요구한다. 흉측한 외모 때문에 세상 사람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으니, 나와 똑같은 괴물을 만들어주면 오직 둘만의 공동체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자신을 제발 행복하게 해달라며, 나를 닮은 괴물을 창조해달라고 절규하는 괴물의 목소리는 너무도 애절하다. “물론 우리는 괴물이 되어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겠지.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더 깊이 아끼고 사랑하리라.” 바로 이런 눈부신 문장이 <프랑켄슈타인>을 ‘괴담’에서 ‘문학’으로 승화시키는 것이 아닐까. 세상 모두가 자신들을 배척할지라도, 우리는 사랑이라는 유일한 안식처 속에서 그 단절을 견디겠다는 괴물의 안타까운 외침이 나를 ‘창조주-인간’의 편이 아니라 ‘피조물-괴물’의 편에 서게 만들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어떻게든 ‘짝’을 찾음으로써 자신의 고통을 위로받고 싶어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 아프다. 자신과 똑같은 외모를 지닌 다른 존재가 있으면 그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아 이 고통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그의 마음이야말로 ‘사랑받고 싶은’ 존재의 본질적인 욕망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사랑받고 싶은 욕망을 지녔다는 점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우리와 똑같다.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약하게 뛰고 있는 가녀린 존재의 심장박동을 포착하는 것, 그것이 문학의 빛나는 권능이기에. 버려진 존재들의 눈부신 패자부활전, 그것이 문학의 힘이기에.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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