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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전쟁과 모험 끝 오디세우스의 후예들은 잔치를 벌였다

등록 2020-03-06 06:01수정 2020-03-06 11:53

[신화와 축제의 땅, 김헌의 그리스 기행]
① 연재를 시작하며

죽은 자 위로한 고대 축제는 가슴속 우정과 애도의 응어리 털어내는 ‘씻김굿’
그렇게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에 대한 불길한 예감 잊어버리려는 의식이기도

이번주부터 3주마다 김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가 쓰는 ‘신화와 축제의 땅, 김헌의 그리스 기행’을 싣습니다. 그리스 4대 제전과 주요 축제들을 신화와 역사, 그리고 철학과 정치의 관점에서 접근하여 그 힘과 뜻을 오늘날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지 살핍니다.

파르테논 신전.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축되었으며,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모셔두었다. 김헌 제공
파르테논 신전.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축되었으며,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모셔두었다. 김헌 제공

5월에서 6월로 넘어가던 그리스는 눈부셨다. 눈 시리게 파란 하늘에 태양이 작열했고, 햇살의 뜨거운 창끝이 닿은 땅은 누런 피부를 푸덕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하늘만큼 파란 에게해는 크루즈가 쟁기질을 하며 묵직하게 나아갈 때마다 구름처럼 하얀 포말을 거칠게 뿜어냈다. 강렬한 햇빛과 상쾌한 바람이 온몸의 감각을 싱싱하게 깨울 때, 하늘과 땅과 바다가 맞닿아 어우러진, 뚜렷한 색깔의 대조는 세상을 더욱더 돋보이게 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세계를 이루는 원초적 물질을 물과 불과 흙과 바람(공기), 이 네 가지로 생각했는지를. 그리스인들이 그 모든 자연의 근본 요소들을 단순한 물질이 아닌, 살아 숨 쉬며 역동하는 신들이라 숭배하며 찬양하였는지를.

그리고 그 선명한 대조의 풍경 속에 돋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비록 지금은 폐허의 잔해만 남아 있지만, 수많은 신들을 위해 세운 신전들의 가지런한 터와 우뚝 솟은 기둥들의 위용이다. 가장 대표적인 유적은 물론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에 건장하게 터를 잡은 파르테논 신전이다. 많이 부서지고 복원의 길이 아직도 멀어 보이지만, 원래의 모습을 상상하기에는 충분하다.

이제 여러분과 함께 달려볼 그리스의 풍경은 지금 남아 있는 유적들과 그에 관련된 오래된 기록들 그리고 그것들이 나에게 불러일으킨 상상이 결합된 허구들이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가깝게 다가서려는 진지한 노력이 만들어낸 것이니, 어이없이 자의적인 것만은 아니다. 특히 ‘신전과 축제’라는 열쇳말로 고대 그리스인들의 삶의 감추어진 비밀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어보려고 한다. 그들의 문명은 당대 지중해 세계를 압도했고, 로마로 계승되어 현재의 서구를 만들어냈으며, 지금 ‘세계화’의 거대한 물결을 주도하는 큰 힘의 뿌리 깊은 원천이다. 따라서 이 여정에 동행하는 일은 독자 모두에게도 시의적절한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고대 올림피아 제전의 스타디움. 그리스 전역에서 모인 탁월한 선수들이 이곳에서 기량을 겨루었다. 김헌 제공
고대 올림피아 제전의 스타디움. 그리스 전역에서 모인 탁월한 선수들이 이곳에서 기량을 겨루었다. 김헌 제공

■ 범그리스 축제와 문명의 현장

고대 그리스인들의 가장 중요한 축제로서 근대 올림픽의 기원인 올림피아 제전의 현장을 비롯해서, 전 그리스인들의 축제였던 피티아, 이스트미아, 네메이아 제전 등 이른바 4대 ‘범그리스 제전’(Panhellenic Festival)의 현장을 둘러보겠다. 덧붙여, 비극경연대회가 열렸던 디오니소스 제전을 비롯해서 고대 그리스의 문화적, 정치적 중심지였던 아테네의 중요 제전들을 살펴볼 것이다.

축제의 현장을 둘러보면서, 그리스 문명사의 흐름을 대표하는 중요 유적지를 짚어보려고 한다. 최초의 문명인 미노아 문명의 중심지 크레타와 산토리니 섬을, 그 뒤를 잇는 미케네 문명의 중심지를, 그리고 암흑기와 상고기를 거쳐 그리스 고전기를 꽃피워낸 아테네를 둘러볼 예정이다.

그 이후의 그리스 역사는 위대한 정복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행보로 이어진다. 그는 그리스를 통합하고 코린토스에서 범그리스 동맹을 결성한 후, 페르시아를 치러 간다. 그의 첫번째 계획은 소아시아(지금의 터키)의 서쪽 해변을 따라 내려가 마침내 이집트에 이르는 것이었다. 이 원정의 상징적인 장소는 바로 이집트 북서부 해안, 지중해와 맞닿아 있는 알렉산드리아다. 알렉산드로스는 바로 이곳을 자신의 왕국의 중심지로 삼아 ‘지중해의 아테네’로 만들고자 했고,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도시의 이름에 새겨 넣었다. 그는 뛰어난 지휘관에서 불세출의 영웅으로 거듭났으며, 사후에는 신격화되어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신화와 축제의 땅’을 찾아가는 이번 연재를 통해서 여기까지 여러분과 동행할 것이다.

이 여정에서 고대 그리스를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의 뼈대 위에 유적을 소개하며 신전과 축제의 현장감을 살리고자 한다. 당연히 관련 신화가 빠질 리 없다. 정치, 군사, 외교, 경제와 같은 묵직한 항목들이 역사를 이끌어나가는 동력이라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겠지만, 사람들의 삶에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들, 즉 신화와 종교, 축제와 문화가 고대 그리스의 역사를 이루었음을 기억하며 이 길을 가려고 한다. 그리고 그 힘이 무엇인지,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냈는지를 다시 생각해보려고 한다.

그리스 에게해 남부에 자리잡은 화산 군도 산토리니섬. 지평선 위에 눈처럼 보이는 하얀색 건물들이 보인다. 김헌 제공
그리스 에게해 남부에 자리잡은 화산 군도 산토리니섬. 지평선 위에 눈처럼 보이는 하얀색 건물들이 보인다. 김헌 제공

■ 가장 아름다운 일, 축제

그리스에 관해, 특히 문화와 신화적 측면에서 이야기를 꺼낼 때, 가장 적절한 시작은 역시 호메로스다. 그의 <오디세이아>에서는 이 연재의 여정과 관련해서 아주 중요한 질문이 던져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인가?” 오디세우스는 주목할 만한 대답을 내놓는다. 그는 트로이아 전쟁에 징집되어 10년 동안 전쟁을 치르다가, 목마 작전을 성공시켜 전쟁에 마침표를 찍은 영웅이다. 지난한 전쟁을 끝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일 또한 고되고 힘들었다. 다시 10년이 걸렸다. 마지막 순간에는 쪽배에 몸 하나 겨우 싣고 바다를 건너다가 거센 폭풍을 만나 죽을 뻔했다.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착한 곳은 알키노오스 왕의 섬이었다. 왕은 오디세우스를 따뜻하게 환영하고 수많은 사람들을 왕궁으로 불러들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다양한 운동경기가 열려 빼어난 젊은이들이 힘을 겨루는 볼거리를 제공했으며, 악기 연주와 노래가 흥을 돋우었다.

이를 바라보던 오디세우스는 감회를 털어놓았다. “알키노오스 왕이시여, 목소리가 신들과도 같은 노래꾼의 노래를 듣는다는 것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이보다 더 큰 즐거움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람들의 마음엔 기쁨이 가득하고, 잔치에 참여한 사람들은 다닥다닥 붙어 앉아 집 안 곳곳에서 그의 노래를 듣습니다. 어디 그뿐인가요? 식탁마다 빵과 고기가 가득 차려 있고, 술동이에서 시동들이 술을 가져다가 술잔에 가득 따라줍니다. 이것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일입니다.” 20년의 전쟁과 모험으로 심신이 너덜너덜해진 오디세우스가 사람들이 축제를 즐기는 모습을 보고 감격하며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은 말이니, 그 말 그대로 믿어도 좋다.

파르테논 신전.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축되었으며,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모셔두었다. 김헌 제공
파르테논 신전. 페르시아의 침략을 물리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건축되었으며,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나 여신을 모셔두었다. 김헌 제공

■ 슬픔과 고통을 달래는 축제

축제에 관해선 오디세우스의 친구 아킬레우스의 사연도 빼놓을 수 없다. 그도 원치 않는 전쟁에 참여했다. 목숨을 걸고 10년 동안 싸웠으며 전투마다 놀라운 전공을 세웠지만 상응하는 대접을 못 받았다. 오히려 총사령관 아가멤논에게 모욕을 당했고, 아끼던 여자까지 빼앗겼다. 분노한 아킬레우스는 앙심을 품고 전쟁에서 빠졌다. 그런데 그 때문에 가장 사랑하던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잃었다. 슬픔과 분노가 폭발하여 전쟁터에 뛰어든 아킬레우스는 친구를 죽인 헥토르를 단칼에 쓰러뜨렸다.

복수를 완수하고 전투에서 돌아온 그는 친구를 위해 애도했고, 애도의 뒤끝을 씻어내려고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전쟁의 와중에 축제라니! 달리기와 창던지기, 활쏘기와 권투, 레슬링 그리고 마차 경기까지. 건장한 사내들을 사로잡을 번쩍번쩍한 상품이 내걸리자, 전사들은 전투에서 사생결단의 힘을 다하듯 격렬하게 경쟁했다. 이를 지켜보던 병사들은 함성을 지르며 열띤 응원을 보냈다.

죽은 자의 넋을 위로하고 그의 이름을 드높이는 예식이었지만, 전우들의 가슴속에 맺힌 우정과 애도의 응어리를 함께 털어내는 씻김굿이었다. 그리고 죽은 그처럼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운명에 대한 불길한 예감을 떨쳐내려는 거룩한 의식이었다. 그렇게 아킬레우스와 전우들은 죽은 친구에게 온 힘을 다해 예를 표했다. 살아남은 자들의 애통함과 두려움을 한바탕 축제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죽음이 도사리는 전쟁터로 비장한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오디세우스와 아킬레우스의 후예들은 다양한 축제로 살아가던 사람들이다. 각 도시마다 고유한 성격의 축제를 열어 삶에 활기를 불어넣고, 축제를 생활의 주기로 만들어 찬란한 문명과 고유한 역사를 일구었다. 이제 그 현장으로 가보자.

김헌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부교수

김헌 교수는 서울대 철학과(고대철학 전공) 석사와 서양고전학 협동과정 석사 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수사학>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부교수로 있으며, <인문학의 뿌리를 읽다> <그리스 문학의 신화적 상상력>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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