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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우리는 매일 죽지만 매일 태어난다

등록 2020-02-14 06:00수정 2020-02-14 13:54

[책&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살갗 아래

토머스 린치 외 지음, 김소정 옮김/아날로그(2020)

지난 주에 친구에게 이런 문자를 받았다.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길 걸.” 문자 뒤에 <시엔엔>(CNN) 기사가 붙어 있었다.

기사의 제목은 “This orangutan saw a man wading in snake-infested water and decided to offer a helping hand”(원문링크)였다. 기사 밑에는 자신의 생존도 심각한 위기에 처한 보르네오 섬의 오랑우탄이 물에 빠진 인간에게 구원의 큼직한 손길을 내미는 사진이 실려 있었다. 오랑우탄은 털복숭이 긴 팔을 쫙 뻗었다. “내 손을 잡아. 얼른.” 깊은 숲이 깜짝 놀랄 이야기로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친구의 말이 맞았다. 사랑하지 않고는 못 배겼다. “그래, 손은 이러라고 있는 거지!” 아름다운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그래, 눈은 이런 걸 보려고 있는 거야.” “귀는 이런 걸 들으려고 있는 거야.” 그 반대의 경우엔 반대의 생각이 든다. “손은 이런 일을 하려고 있는 게 아니야.” “눈은 이런 걸 보려고 있는 게 아니야.” 우리의 몸은 대체 무엇을 하려고 백만년에 걸쳐서 지금 이 모습으로 진화한 것일까?

열다섯명의 작가가 폐, 간, 대장, 피, 뇌, 자궁 등 몸의 열다섯 부분에 대해 쓴 글을 모아 엮은 <살갗 아래>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내장과 두뇌의 어떤 특성이 우리를 우리 자신이게 만드는 것일까?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심장 판막이나 암에 걸린 방광, 툭 불거져 나온 광대뼈가 우리 자신이라는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주는 것일까? (…) 어머니의 눈, 아버지의 이마 선이 우리를 만들까? 아니면 주근깨, 다리, 심장병이 우리를 만드는 것일까? 우리가 지금의 우리가 된 이유를 밝힐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기나 할까?”

우리가 지금의 우리가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는 채로 자신의 몸을 어떻게 쓰든, 어찌 해볼 도리가 없이 마음을 울리는 문제가 있다. 시간이다. 깊은 잠 속에서도 시간은 흐르고 우리 몸은 소멸을 향해 간다. 인간은 자신의 은밀한 희망사항과 두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 혼자서 옷을 들추고 몸을 들여다보는 고독한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이 책의 마지막에는 자궁이 빚어낸 이야기가 실려 있다. 1882년 부슬비가 내리던 겨울 아침, 워싱턴에서 디프테리아에 희생된 어린 아가 해리의 장례식이 열렸다. 아기 어머니는 등을 구부린 채 가느다란 팔로 배를 잡고 울었다. 그날 아기 무덤 앞에서는 목사도 사제도 아닌 당대의 저명한 무신론자의 추모 연설이 울려퍼졌다.

“말로 슬픔을 달래려는 시도가 얼마나 허무한 일인지 잘 압니다. 경이로운 생명의 나무에서는 꽃봉오리와 꽃이 익어가는 열매와 함께 떨어져 내리고 땅 위에서 흔히 보는 침대에서는 가장들과 아기들이 나란히 누워 있습니다. 모든 요람은 우리에게 어디에서 왔는지 묻고, 모든 관은 우리에게 어디로 가는지를 묻습니다. (…) 우리를 기다리는 운명도 모두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우리의 종교가 있습니다. 바로 이런 종교 말입니다. 살아 있는 사람을 돕고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몸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는 얼추 운명의 시작과 끝을 중간 부분보다 먼저 안다. “사람의 언어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운율을 맞추고 있는 단어는 ‘자궁’(womb)과 ‘무덤’(tomb)이다.” 이 어원에 따르면 우리는 매일 죽지만 매일 태어난다. 시간이 변하고 우리도 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덤’(grave)은 ‘감사’(grace)와도 ‘은총’(gratitude)과도 어원을 공유한다. 우리는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묻기를 멈추지 못하겠지만 살아 있는 생명끼리 손을 내밀며 살아내는 삶이야말로 시작과 끝이 우리에게 준 은총이라고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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