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김민정 지음/문학과지성사(2019)
최근에 나온 김민정의 시집을 읽다가 지상에 사는 이들이 끝내 지켜야 할 자존심에 대해 생각했다. 사는 일이란 쓰고 떫은 맛을 견디다가 급기야는 그 쓰고 떫은 맛에 배인 그윽함을 향유할 줄 알아가는 일임을 가르쳐주었던 시인의 이전 시집들에 대한 독후감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인상이라고 말해둔다. ‘자존심’은 자신의 품위를 스스로 지키는 마음, 자기 자신을 존중할 때 자리할 수 있는 마음 상태. 시인은 그를 가꾸기 위해 부단히 애를 쓰는 것 같다. 이는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자존심이 대수냐’, ‘그까짓 자존심은 넣어두라’는 세상의 조언과는 다른 방향의 태도임이 분명하다. 시는 ‘그까짓’이랄 게 없는 세상을 바라는 과정에서 일구어지는 말들의 움직임임을 시인이 믿을 때 가능한 태도일 것이다.
자존심을 제대로 지키고자 하는 이는 세상의 헛것을 가려내는 눈을 갖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안다. 세상이 줄 세우려는 가치를 걷어내고, 진짜배기를 발견하기 위해 마음껏 떠도는 시간이 허깨비가 아니라는 사실 또한 안다. 가령 다음과 같은 시에서, 꿈에서 현실로 뻗어나가는 손의 구체적인 이미지, 그것을 좇는 일 같은 것.
“등에 업은 포대 자루에 의지한 채/ 찻잎을 땄다./ 할당량이 주어져 있으므로/ 있는 대로 땄다./ 닥치는 대로 땄다./ 빠르게 땄다./ 많이 땄다./ 따기밖에 더 할밖에, 그러니/ 죄다 땄다./ 다 땄다.// 잎을 따면 그 즉시로 새잎이 돋았다./ 징글징글한 녹색의 횡포였다./ 무서운 건 노동이 아니라/ 나무였다./ 나무가 많으니 사라지는 건/ 손이었다./ 20킬로그램을 채우면 2천 원을 건네는/ 것도,/ 손// 포대 자루를 탈탈 털었을 때/ 잘린 여자들의 손목이 우르르 쏟아졌다./ 정육점 빨간 대야 위에/ 다소곳이 쌓여 있던 돼지 발들이/ 바닥으로 굴러떨어지는 소리처럼/ 와르르/꿈이랍시고 깨어났는데,// 네트 사이로 흰 배구공이 오가고 있었다./ 통 하면 통 하는 흰 배구공의 랠리/ 까무잡잡한 피부에 바싹 올려 묶은 곱슬머리에/ 금빛 링 귀걸이를 한 스리랑카 선수들이/ 스파이크로 내리꽂히는 흰 배구공에 자꾸만/ 맞고 있었다./ 한 템포 빠르게 뻗지 못하고/ 두 템포 느리게 갖다 대던 그이들의 손/ 것도,/ 두 손에/ 손들.// 게임 스코어 3 대 0/ 제19회 아시아 여자 배구 선수권 대회에서/ 퍼펙트 승리를 기록한 한국 선수들이/ 손에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쳤다./ 내미는 손들이 모여 원이 되는 함성/ 그 너머로/ 굽슬굽슬하고 시꺼멓고 긴 제 머리카락을/ 있는 대로 따다,/ 닥치는 대로 따다,/ 빠르게 따다,/ 따기밖에 더 할밖에, 그러니/ 죄다 따다,/ 그 즉시로 풀기만을 반복하던/ 스리랑카 선수의/ 것도,/ 손.”(김민정, ‘꿈에 나는 스리랑카 여자였다―곡두 5’ 전문)
꿈속 스리랑카 여인의 찻잎을 따는 노동, 꿈에서 깬 뒤 지켜본 배구경기 장면 모두에서 시인의 시선은 일하는 이의 손을 향해 있다. 가난이 억압하는 숨, 그럼에도 제압되지 않는 생명, 승리가 만든 환호, 패배로 인한 낙담 등 풍진 풍경이 이어지는 한가운데에서 우직하게 거기와 섞일 줄 아는 손. 자존심을 지키며 사는 일이란, 어쩌면 세상을 지배하는 힘의 질서와는 상관없이 우리 손으로 삶의 현장이 만들어진다는 걸 승인하는 일과 같은 것일 수도 있겠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