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김혜순(사진) 시인의 3년 전 시집 <피어라 돼지>에는 ‘돼지는 말한다’ ‘뒈지는 돼지’ ‘돼지에게 돼지가’ 등 총 열다섯 개의 소제목을 단 시편들로 구성된 한 편의 장시 ‘돼지라서 괜찮아’가 실려 있다. 제목의 ‘괜찮아’라는 표현만을 얼핏 봤을 때는 명랑한 분위기의 시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돼지’의 편으로 건너가 ‘돼지라서 괜찮아’라는 말이 꺼내어지는 순간, 42페이지에 이르는 이 기나긴 시에 잠재된 정서는 삶의 애환과 비정함, ‘인간’의 잔인한 폭력성에 맞서는 ‘살아 있음’의 절규에 가깝다는 것을 금세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시가 “있지, 지금 고백하는 건데 사실 나 돼지거든. 있지, 나 태어날 때부터 돼지였어”라고 말하기 시작할 때, ‘돼지’의 자리엔 궁핍한 언어에 매달려 있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마는 시인의 생애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의 내력, 생명과 죽음, 악을 쓰면서 산다는 것 또는 살아남는다는 것의 의미가 겹쳐 읽히기도 한다. 아프리카돼지열병의 확산을 저지한다는 명목으로 살처분된 돼지의 핏물이 임진강으로 유입된 사진을 목도하면서는, 초현실적으로 존재의 경계를 넘나드는 것만 같던 이 시의 환상적인 목소리가 더는 거짓이 아니라 비극적인 현실의 정직한 말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의 제목과 같은 ‘피어라 돼지’의 일부를 읽는다.
“훔치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죽이지도 않았는데 죽어야 한다/ 재판도 없이/ 매질도 없이/ 구덩이로 파묻혀 들어가야 한다// 검은 포클레인이 들이닥치고/ 죽여! 죽여! 할 새도 없이/ 배 속에서 나오자마자 가죽이 벗겨져 알록달록 싸구려 구두가 될 새도 없이/ 새파란 얼굴에 검은 안경을 쓴 취조관이 불어! 불어! 할 새도 없이/ 이 고문에 버틸 수 없을 거라는 절박한 공포의 줄넘기를 할 새도 없이/ 옆방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뺨에 내리치는 손바닥을 깨무는 듯/ 내 입안의 살을 물어뜯을 새도 없이/ 손발을 묶고 고개를 젖혀 물을 먹일 새도 없이/ 엄마 용서하세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할 새도 없이/ 얼굴에 수건을 놓고 주전자 물을 부을 새도 없이/ 포승줄도 수갑도 없이// (중략) // 무덤 속에서 운다/ 네 발도 아니고 두 발로 서서 운다/ 머리에 흙을 쓰고 운다/ 내가 못 견디는 건 아픈 게 아니에요!/ 부끄러운 거예요!/ 무덤 속에서 복부에 육수 찬다 가스도 찬다/ 무덤 속에서 배가 터진다/ 무덤 속에서 추한 찌개처럼 끓는다/ 핏물이 무덤 밖으로 흐른다/ 비오는 밤 비린 돼지 도깨비불이 번쩍번쩍한다/ 터진 창자가 무덤을 뚫고 봉분 위로 솟구친다”(‘돼지라서 괜찮아’ 부분)
시인의 목소리를 통해 들리는 ‘생명’은 저 자신의 자리에서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상태로 스스로 있는 존재이지만, 인간이 마련한 세상에서 그이는 ‘무조건’ ‘죽어야 하는’ 처지에 있다. 구제역으로 인해 땅에 묻힌 돼지들을 연상케 하면서 2012년 처음 독자들에게 선보였던 이 시를, 다시 떠올리는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왜 몰랐나.
문학평론가
피어라 돼지
김혜순 지음/문학과지성사(2016)
김혜순 시인.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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