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시집 <사라진 재의 아이>(현대문학·2018)에서 페루와 볼리비아, 칠레 여행을 막 마치고 돌아온 내게 친구가 그곳은 무엇이 맛이 있더냐고 물었을 때 제일 먼저 감자가 떠올랐다. 남미 사람들의 접시 위에는 구워지거나 튀겨지거나 으깨지는 등 각종 조리법을 거친 감자가 꼭 있었다. 특히 쿠스코의 한 노점 화덕 위에서 자글자글 익고 있던 꼬치구이에는 감자 한 알이 통째로 꽂혀 있었는데, 잘 구워진 감자 한 알의 포실포실한 식감은 고산증으로 고생하던 나를 한 순간에 달래주었다. 하지만 여러 감자 요리 중 제일 맛있었던 건 다름 아닌 감자튀김이었다. 한국에서도 흔히 먹을 수 있는 바로 그 ‘감튀’ 말이다. 여행 내내 접시마다 곁들여진 감자튀김은 흔한 패스트푸드점의 프렌치프라이와는 차원이 다른 두께로 기운 빠진 여행객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소금도 별로 안 치고 오직 으깬 감자 속으로만 승부하는 남미의 ‘감튀’를 먹자니, 감자를 스페인어로 ‘파파’, ‘파파스’라고 하는 이유를 정서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령 다른 지역에선 ‘아버지’를 이르는 말과 이 지역에서 ‘감자’를 이르는 말이 같은 걸 보면 이 사람들에게 감자는 어지간히 친숙한 식재료인가 보다는, 괜한 연관관계를 만드는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남미는 감자지!’라고 답변하는 내게 친구는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세계 어딜 여행해도 사람들은 감자가 맛있더라는 얘길 하던데? 유럽 여행을 다녀온 사람도 그렇고 또….’ 그러고 보니 어디에서든 어떤 시대든 감자는 특히 든든함을 차지해왔지 않았나. 인류가 감자를 먹기 시작할 때부터 줄곧, 다른 무엇이 더 없어도 다른 누구와 나눌 수 있는, 누추함 하나 없이 당당한 포만감의 열매, 땅의 사과. 이기성 시인의 시에서 감자는 무언가를 보는 사람의 감정이 충만한지 혹은 허기져 있는지를 가늠하는 소실점으로 자리해 있다. “당신은 감자를 보고 있는 것. 작고 둥글고 움푹 팬 자리마다 검은 싹이 나는 것. 뭉툭하게 잘린 발처럼 썩어가는 것. 당신은 물끄러미 감자를 보는 것. 고아처럼 희고 딱딱한 감자. 꿈속처럼 몽롱한 감자. 한없이 감자를 보는 것. 당신은 멈추지 않는 것. 그러다 문득 목이 메는 것. 햇빛이 손끝에서 식어가는 것. 식당의 내부가 완전히 어두워지는 것. 당신은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기성, ‘감자를 보는 것’ 전문) 감자를 보는 ‘당신’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고도 감자의 울퉁불퉁한 생김새가 남기는 감정을 안다. 그런 감자가 희고 딱딱하게 자라고, 몽롱하게 익고, 덩어리째 삼켜지다가 열기를 잃는 과정을 안다. 한없이 보는 일이 곧 무언가를 전부 알 수 있는 일이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적어도 살아 있는 것을 상상하기 위해 감자에 매달리는 일이 “더 이상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으로부터 어떻게든 거리를 둘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시인은 아는 것 같다. 내가 태어난 제주에선 ‘지슬’이라 불리던 감자로 민중들이 배고픔을 달래며 4·3을 겪어냈고, 이처럼 가진 게 별로 없는 이들이 계속 ‘살아 있는 사람’일 수 있도록 버티게 해준 역사가 감자에겐 있다. 누굴 살리는지 그 반대인지도 가늠 못하고 함부로 자극적인 말을 해대는 정치인들이 만들어내는 피로를 털어내고, 오늘 저녁으론 울퉁불퉁한 감자를 삶아먹어야겠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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