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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사라지지 않기 위한 몸짓에 관하여

등록 2019-06-21 06:01수정 2019-06-21 20:02

[책과 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오브제’
박세미 시집 <내가 나일 확률>(문학동네·2019)

최근에 이사를 했다. 서울에 터를 잡기 시작해 방을 옮겨 다녔던 횟수가 여럿이지만 이번 이사의 경우는 내 인생의 그 어떤 시기보다 많은 책을 보유한 때라서 이사를 하는 내내 애를 먹었다(나의 책들은 철저히 나이와 비례하는 것 같다). 새로운 집으로 이동하자마자 친구와 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책 정리를 나름대로 시도했으나 처음 내가 의도한 대로 정리하진 못하고 한쪽 벽에 허겁지겁 쌓아두기만 했다. 느닷없이 낯선 곳으로 이동한 책의 입장에서는 어리둥절할 것이다. 자신이 있는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여길지도 모를 일이다.

어수선한 주위를 둘러보며 괜히 마땅한 자리를 내어주지 못한 게 아닐까 하는 심정으로 사물들을 의식하는 일, 혹은 사물 역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저마다 취하는 몸짓이 있다고 생각하는 일은 박세미 시인의 첫 시집에서 다음의 시를 만나고 하기 시작했다.

텔레비전은 음소거로 해두고/ 동그랗게 뜬 눈을 허공에 걸어둔다/ 스스로 없어지지 않기 위해/ 살아 있을 때 즐겨 취하던 포즈가 된다// 첫 번째와 마지막이 사라진 계단은/ 흑백사진으로 걸리고/ 살아 있는 계단은/ 계단을 재현한다// 나를 또 만들어/ 번식할 수 있다면/ 가지를 쳐내듯 툭툭 떨어져나가도/ 몸 하나가 남겨질 수 있다면/ 어떤 날 혹은 매일매일// 빨래들은 거꾸로 매달려 물을 뚝뚝 흘리고/ 솜을 채워넣은 쿠션들은 숨을 참고/ 등 : 척추 마디마디를 늘이는 기분으로 둥글게 만다/ 팔 : 견갑골을 최대한 들어올리고 등에서 날개를 뽑아내듯 뻗는다// 주변이 사라질 때/ 스스로 없어지지 않기 위해/ 살아 있을 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포즈가 된다/ 하나 혹은 여럿”(박세미, ‘오브제’ 전문)

시인의 엉뚱하고 귀여운 상상력은 가시권 밖 사물들의 안부를 살피는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 사물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자 안간힘을 쓴다는 얘기는 곧 사물들이 저 자신이 여러 공산품 중 하나라는 인지를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는 일. 자신의 단독성을 확보하기 위해 이들은 표정을 만들고 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행위를 한다. 사람은 어떤가. 공산품이 아니므로 사람의 몸은 암만 용을 써도 지금 이곳에서 벗어날 수도, 복제될 수도 없다(에스에프 영화 속 얘기가 아직 현실은 아니므로 일단은 이렇게 쓴다). “가지를 쳐내듯 툭툭” ‘떨어져나갈’ 수 없고, 떠나거나 또는 남겨지거나 둘 중 하나의 형태로 분명하게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사람 몸의 고유성을 자각하게 한다. 지금 이곳에서 달아날 수 없다는 조건 자체가 ‘나’의 존재감을 없애려 하는 외부의 강압적인 힘에 스스로 맞서도록 만드는 것이다. 주변이 기이하게 바뀔 때 “하나 혹은 여럿”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포즈”가 개시된다.

한편 이 시의 마지막 연에서 나는 또 다른 상황을 동시에 떠올린다. 마지막 연은 함께 생활을 꾸려왔던 이들이 터를 옮기는 상황이 왔을 때, 한 사람이 보지 못한 곳에서 다른 사람은 어떤 표정으로 있을지에 대한 상상을 추동하기 때문이다. 나는 요즘 딸의 이사를 도와준 엄마가 홀로 잠들 때 어떤 표정으로 밤을 맞이할지 궁금하다. 엄마와 딸은 서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포즈”만으로 서로를 향한 애틋함을 키워나가는 사이인지도 모르겠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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