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우주적인 안녕>(문학과지성사, 2019) 몇해 전 학생들과 호주 예술가 패트리샤 피치니니의 작품 <젊은 가족(The Young Family)>(2002)을 사진 이미지로 감상한 적이 있다. 얼핏 암퇘지처럼 보이는 생명체가 웅크린 채 어린 생명체들에게 젖을 물리는 상황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기이한 느낌을 준다. 짐승으로 추정되는 생물체의 손과 발, 쳐진 피부, 주름과 털 등이 사람의 것과 다름없다는 인상을 남기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의 사실성을 더하기 위해 인간의 체모 등을 동원하여 조형물을 만든다. 나는 학생들에게 ‘이 존재가 여러분 집의 문을 두드린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겠는지’ 물었고 학생들은 ‘징그러워서 놀랄 것 같다’, ‘그래도 저 존재의 감정이 넘치는 눈은 외면하지 못할 것 같다’는 등 다양하게 답변했지만, 작품 속 존재를 향해 말을 걸겠다는 반응은 없었다. 낯설게 느껴지는 상대에게 자신과 대화를 나눌 언어가 부재하리라는 단정은 우리가 마냥 옳다고 여겨왔던 ‘모든 사람은 생김새나 위치, 정체성 여부에 상관없이 동등하다’는 생각이 현실에서 얼마나 얄팍하게 수용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혹은 자신이 상정한 ‘인간’의 형태를 따르지 않는다고 지금 눈앞의 대상을 사람으로 판단하지 않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지,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고민하도록 만든다. 피치니니는 이름 없는 생명체의 호소력 있는 눈빛과 마주한 관객을 향해 ‘당신은 당신이 매우 다르다고 여기는 이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고 직설적으로 묻는다. 최근에 출시된 가수 황소윤의 솔로 앨범 커버에서 피치니니의 또 다른 작품을 발견하고 비슷한 질문과 다시 부딪쳤다. ‘안녕’ 하고 인사를 건네는 것 같은 작품 속 존재와 나는 눈을 맞추고 대화할 수 있을까. 구체적인 몸을 가진 존재들은 추방과 배제와 기피 없이 어떻게 만날 수 있나. 시의 방식은 좀 다르다. 낯선 이와 나누는 대화의 가능성을 하재연의 시에서 읽는다. “내게 주어진 식물에게서/ 너의 계절의 냄새가 나기도 하였다/ 나는 내가 가진 흙의 구멍을 파는 법을 상상한다// 지구가 아닌 행성에서/ 살아가는 아주 많이 다른/ 생물의 생김새를 눈 뜨고 그리는 법과도 같이// 하나의 말이 끝나면/ 또 하나의 말이 뒤따르지만/ 어떤 말로도 대신할 수 없는 말// 한 가지를 생각해내기 위해/ 이곳에서 너무 오래 살아왔다// 내가 잠을 자고 다시 깨는 동안/ 나의 잠에 동참하지 않은/ 모든 생명체들이/ 느리고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다// 내가 본 적 없는/ 표정을 오늘 아침에 고안해낸 너의 얼굴// 빛의 차양을 간직하고 있다가/ 내 눈을 멀게 하는/ 단 하나의 장면 또는/ 틈 사이로 솟아오른 시간// 다시는 살아보지 않게 될/ 또 다른 해와 같이/ 너의 얼굴이 내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하재연, ‘또 다른 해’ 전문) 낯설다는 느낌은 바깥에서도 오지만 ‘내’ 안에도 있는 것, 혹은 ‘내’가 멈춰 있어도 “격렬하게” 움직이면서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이곳의 시공간만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하는 것. 시인은 내가 살지 않는 방식으로 살아갈 이의 삶도 거기에 있고, 나 역시 지금껏 살아왔던 방식대로만 살라는 법은 없으므로 낯설다는 느낌을 형성하는 장면과 말의 고유성을 품은 채 ‘살아내는’ 길을 택한다. 나는 이런 태도가 우아하게 용감하다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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