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창비, 2019) 여행 갔다가 사온 유리 공예품을 일곱 살배기 조카가 만지작거리던 중의 일이다. 작은 새 모형이 마음에 들었는지 조카는 자신에게 그것을 선물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평소에도 아이가 무언가 부탁을 해오면 “@@@을 하면 사줄게”와 같이 습관적으로 말했는지라 그날도 나는 조카를 향해 “씩씩하게 잘 지내고 있으면 줄게”라고 답했다. 조카가 다시 물었다. “이모는 왜 잘 지내야만 준다고 하는 거야?” 아이는 분명 새 모형을 ‘선물’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선물은 그것에 따른 대가를 따로 바라지 않는 것이라고 했던 철학자 자크 데리다의 얘기도 있지만, 조카의 말에 대한 나의 응답은 분명 아이와 나 사이에 열렬한 환대와 우정이 자라도록 하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대에게 조건을 갖추기를 요구하고, 위계를 형성하는 관계를 맺게 하는 말이었다. 조카가 던진 저 질문은 어떤 상황이든지간에 그것이 가능하려면 그에 따른 조건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여겨왔던 나의 습관적인 사유 패턴을 돌아보게 했다. “작고 무른 것을/ 사람들은 어떻게 기르나 어떻게/ 사랑하나// 저 알 수 없는 것을/ 자꾸만 꼬물꼬물 숨 쉬는 것을// 부둥켜안고 어디로 달려가나/ 순백의 울음소리가 병원 복도를 번쩍이며 스칠 때/ 더운 가슴팍을 할퀼 때// 사람들은 아프고/ 잇따라 울고// 또 어떻게 웃을 수 있나// 저 작고 무른 것을 두고/ 살아야겠다/ 살아야겠다 기도할 수 있나// 불 꺼진 진료실 앞/ 멀거니 앉아 순서를 기다릴 때 어떤 삶은/ 까무룩 쓰러지듯 잠들 때//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고/ 더욱 더 선명하고// 어떻게 웃을 수 있나/ 어떻게// 나는 태어날 수 있나”(박소란, ‘아기’ 전문) 시인은 시작과 끝이 공존하는 병원에서 아무것도 갖지 않은 채 태어난 “저 작고 무른” 생명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묻는다. 이 질문의 방향은 숭고하다. “저 작고 무른” 그것이 어떤 인간인지를 식별하기 위해 ‘왜 태어났는지’를 묻는 게 아니라, 어떤 존재든지 간에 그 생명이 ‘어떻게 태어날 수 있는지’를, 그러니까 저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삶이 삶다운 모습을 띠면서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묻고 있기 때문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난관에 부딪칠 때마다 ‘왜 사는가’ 하고 생각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왜라는 이유와 조건이 있어야만 사는가?’ 이유와 조건을 찾는다면 지금 당장의 고통이 덜어질 순 있겠지만 그 고통의 지속을 막지는 못한다. 왜 사는가. 이유는 없다. 살아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해 다음으로 가는 것, 그것이 우리가 살아 있는 방식이다. 아마도 내게 조카의 말은 어떤 조건을 갖추거나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고 해서 파괴되어선 안 되는 것이 곧 삶이라는 가르침으로 다가온 것 같다. 부족한 지면이나 몇 마디 더 하자. 조카와 식당엘 갔다가 ‘노키즈존’이라는 이유로 출입을 저지당한 적이 있다. 아이는 온몸으로 함께 사는 사람들을 향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질문하는데, 그에 대한 응답으로 특정 조건만을 요구하는 이들이 있구나 싶었다. 어떻게 사는 건가. 따지고픈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러진 못했다. 아이와 손잡고 식당에 등을 돌려 나왔다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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