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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욕망의 깊은 곳에서 우리는 소비자다

등록 2019-03-08 06:00수정 2019-03-08 20:10

[책과 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거지 소녀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문학동네(2019)

사회가 꼭 변해야 하는 이유가 추가되었다. 미세먼지 때문에라도 제발 무슨 변화가 생겼으면 좋겠다. 앨리스 먼로의 소설 <거지 소녀>는 변화를 말하지는 않는다. 대신 ‘안정’ 에 대해서 말한다. 가난한 지역 출신 주인공 로즈는 소심한 역사학도, 백화점 소유주의 아들이지만 사업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패트릭의 사랑을 받는다. “네가 가난해서 나는 좋아. 너무 사랑스러워. 거지 소녀 같잖아.”

거지 소녀는 패트릭이 좋아하는 그림이었다. 패트릭은 로즈를 위해 역사는 팽개치고 백화점 후계자가 되기로 재빨리 결심한다. 결혼 후 패트릭이 가장 공을 들인 것은 집이었다. 간접조명이 달린 파우더룸, 걸어 들어갈 수 있는 대형 벽장, 조명 달린 분수, 무화과 잎으로 몸을 가린 동상…. 패트릭은 사람들을 초대해 집 자랑을 하곤 했다.

로즈의 친구 조슬린 부부는 오랜 세월 가난했다가 꽤 부자가 되었다. 가난했던 시절 조슬린은 중산층의 속물근성을 경멸하곤 했었다. 한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안정되면 그 후의 삶은 어떤 걸까? 조슬린이 로즈에게 털어놓은 말을 요약하면 대략 이렇다.

“우린 시간이 지나서야 돈을 쓸 수 있었어. 우린 컬러텔레비전을 가진 사람들을 경멸했지만, 하지만 그거 알아? 컬러텔레비전은 굉장해! 요즘 우리는 빈둥거리면서 말해. 뭘 살까? 별장에 작은 토스트 오븐을 사다 놓을까? 우리가 서로에게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 우리는 소비자다! 그래도 된다!”

사실 인간의 본성에는 안정을 원하는 속성이 있다. 그것을 인정하고 이런 질문을 떠올려볼 수 있다. “안정되면 뭘 하고 싶어?” 대답은 ‘소비자’다. 욕망의 깊은 곳에서 우리는 소비자다. 하고 싶은 일은 없어도 사고 싶은 것은 많을 수 있다. 요즘 같으면 돈이 좀 생기면 공기청정기를 사고 싶다고 할 수 있다. 공기청정기가 미세먼지의 해결책은 아닌 것처럼 자본주의도 우리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이 연작소설에는 변신에 관한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를 연상시키는 ‘야생 백조’ 이야기다. 로즈의 엄마 플로가 알고 지낸 메이비스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눈에는 다래끼로 진행될 것처럼 보이는 무사마귀들이 있었는데 제거 시술을 받았는지 모르지만 사라졌다. 그러자 메이비스는 아름다워 보였고 프랜시스 파머라는 배우랑 닮아 보였다. 어느날 메이비스는 한쪽 눈을 가리는 커다란 모자와 레이스로만 이루어진 드레스를 한 벌 샀고 리조트로 가서 플로렌스 파머라는 이름으로 예약을 했다. 휴가중인 프랜시스 파머가 누군가 알아볼까봐 플로렌스 파머라는 이름을 둘러댄 거라고 사람들이 생각할 수 있도록 그런 것이었다. 로즈는 ‘변신’할 수 있다는 것은 멋진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름만 살짝 바꿨을 뿐 자기 모습 그대로 변신한다는 것.

요새는 너가 ‘진짜로’ 변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 힘이 세다. 약간 스타일을 바꾸거나 침대보를 바꾸거나 기분 전환을 하러 가거나. 하여간 무슨 일이 생겨도 너가 진짜로 바뀔 필요까지야 없다. 심지어 사람이 죽어나가도 네 생각을 바꿀 필요는 없다는 정도의 의견까지도 만만치 않은 힘을 가지고 있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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