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시집 <그리하여 흘려 쓴 것들>/문학과지성사(2019) 장혜영 감독의 <어른이 되면>(2018)은 발달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어린 시절부터 18년간 장애인 수용 시설에서 생활해왔던 혜정 씨와 그녀의 둘째 언니인 혜영 씨가 시설 밖에서 함께 삶을 꾸려가기를 결정하고 살아가기 시작하는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라고 노래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눌 수 있는 ‘함께 사는 일’에 관한 이야깃거리가 무궁무진하지만, 오늘 이 지면에서는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한 장면만을 짧게 언급하려 한다. 언니와 함께 살면서 사귀게 된 새로운 친구들과 혜정 씨가 캠핑을 갔을 때의 일이다. 저녁 식사를 준비하던 중에 별안간 접시와 반찬이 세팅돼 있던 테이블이 엎어지는 소동이 있었다. 소심한 관객인 나는 테이블이 엎어지는 순간 당황했는데, 정작 혜정 씨의 친구들과 혜정 씨는 서로 면박을 주는 장난을 치며 덤덤하게 상황을 수습함으로써 놀랄(수도 있었을) 일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만든다. 내게 그 장면은 살면서 자연스럽게 빚어지는 어떤 실수, 소란, 예상치 못한 일, 확장해서 생각하자면 모종의 갈등, 여러 사람이 모였을 때 드러날 수 있는 균열 등은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속성이기도 하다는 것을 넌지시 일러주는 장면으로 다가왔다. 이제니의 시 ‘부드럽고 깨어나는 우리들의 순간’은 제각각의 종결어미와 어조를 가진 문장들이 모여 특이한 리듬을 선보이는데, 이 시의 말쑥하지 않은 리듬은 어쩐지 곳곳에 실수와 소란과 구멍을 품고 있는 삶의 (절대 말쑥할 수 없는) 진실한 형태와 닮아 있는 것 같다. “부드럽고 깨어나는 우리들의 순간.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요. 더 많은 곳으로 가보고 싶습니다. 세상은 휴지기 없는 희곡 같다. 누구일까. 사라지는 사이에 당신은 지나갑니다. 과도기의 순간이 넘쳐흐른다. 오래전에 죽었던 광활함 속에서. 꺼내 옵니다. 당신은 당신을 저버리고 있는 것이다. 떠나온 곳에서부터 삶은 다시 시작된다. 다시 모였기 때문에 다시 흐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유아기의 불멸 지수가 결합된다. 지속되는 이상한 일들이 들판을 가로질러 덧붙어 있다. 땅에서는 가늘고 긴 다리가 흩어진 손을 흔든다. 이곳과 저곳에서 조각난 순간들. …(중략)… 먹구름에 둘러싸인 장막과도 같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그것은 울음 같기도 하고 물음 같기도 하다. 마음과 마음으로 알려주기만 하면 됩니다. 서로 뒤엉킨 우리의 발목에서는 구름과 숨소리가 실재를 드러내고 있다.”(이제니, ‘부드럽고 깨어나는 우리들의 순간’ 부분) “휴지기 없는 희곡” 같은 세상에서 삶의 순간, 순간은 ‘우리’의 사이에서 ‘깨어난다.’ 그러니까 우리의 ‘과도기’가 넘쳐흐를 때 삶은 계속된다는 얘기. 예상치 못한 일이 지금을 난폭하게 조각내기도 하지만 그와 같은 상황이 우리 사이에서 빚어지면서 이곳과 저곳의 순간은 덧붙여지는 것이다. <어른이 되면>과 이제니의 시를 함께 떠올린 오늘 우리가, 여럿이 모였을 때 드러나는 균열은 급하게 봉합할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해석하고 대해야 하는지 잘 살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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