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시집 <끝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8) 시는 인간의 언어로 쓰이지만, 인간의 언어를 넘어서는 이해를 시도할 때야 비로소 읽히는 것이기도 하다. 일상에서는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해 당연히 지켜져야 한다고 여겨지던 말의 관습을 무심히 (또는 의도적으로 강력히) 비틀면서 시 안에 자리하는 시어들이, 어떤 울림의 주인은 인간의 것만은 아니라고 일러주기 때문에 하는 얘기다. 상식적으로는 목적어 자리에 있어야 할 사물이 주어의 자리를 차지하고 사방에 말을 걸기 시작한다거나, 습관적으로 통용되던 의미의 문을 닫은 채 말이 활용되는 시를 읽을 때마다 우리는 배운다. 인간이 아닌 인간 주변의 (혹은 인간 사회의 바깥에서) 숨 쉬고 생활하는 모든 것들은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 뿐, 저마다 나름대로의 소리뭉치로 또는 호흡의 방식으로 자신에 대한 표현을 계속해서 할 줄 안다는 것을. 지난달, 한 마리의 퓨마가 동물원을 탈출했다가 사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난 뒤부터 이영광의 시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다음의 시를 논리적으로 매끄럽게 의미를 전하는 말로 이루어졌다고 여기지 말고, 말에 담긴 통증만을 적확히 전하고 싶어하는 신음(呻吟)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기며 읽기로 한다. “수백 수천의 벙어리들이 몸속에 산다/ 시끄러워 죽겠다/?/ 창밖은 언제나 공중이다/ 공중은 거대한 눈알이다// 그는 베란다에 매달려,/ 쇠창살을 쥐고 괴성을 지르는/ 동물원 영장류처럼// 나에겐, 재미가 없다/ 재미라곤 없단 말이다”(이영광, ‘재미’ 전문) 시에서 말하는 이는 누구인가. “수백 수천의 벙어리들”을 끌어안고 사는데도 “시끄럽다”고 신음하는 이라면, 그이에겐 침묵도 그냥 침묵이 아닐 것이다. 인간의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말하고 들을 줄 아는 이일 것이다. 또한 어쩌면 “쇠창살을 쥐고 괴성을 지르는” “영장류”와 다르지 않은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싼 “공중”의 “거대한”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은 이이기도 할 것이다. 그이의 “재미라곤 없단 말이다”고 외치는 절규에서 우리는 자유로이 살고자 하는 의지를 저지당한 자의 절망과 거기서 달아날 수 없는 자의 무기력을 동시에 본다. 그리고 독자인 우리가 그이를 쳐다보기만 하는 바로 그때, 우리는 그이를 관람하고 감시하는 “거대한 눈알”의 부분이 된다. 분명 쳐다보는 것은 우리인데 그이의 목소리가 우리 주변에 가득 찬 나머지, 그이의 절규와 만날 수 없는 우리 자신이 어쩐지 더 고립되어버린 듯하다. 소설가이자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1977년에 발표한 에세이 ‘왜 동물들을 구경하는가?’에서 동물원이 생기면서 동물과 인간 사이에 오가던 시선이 단절되었다는 얘기를 전한 바 있다. 인간은 동물다운 모습을 볼 것이라 기대하며 동물들을 ‘관람’하러 동물원에 가지만, 거기에 갇힌 동물들은 제 언어와 표정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인간들을 스치듯 외면해버리거나 곁눈질로 쳐다만 볼 뿐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언어만을, 인간의 방식만을 세계와 소통하는 유일한 길로 삼는 자들의 사회에서 고립되는 것은 쇠창살 안에 갇힌 동물만이 아니다. 그들과 아무런 교감을 할 수 없는 인간 자신도 마침내 고립되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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