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의 한 호텔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주최하는 ‘세계한국학대회’ 참석차 방한한 권헌익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자신의 연구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내년은 일제의 식민 지배에 항거하는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째 되는 해다. 어떤 공격적 행위도 없이 그저 두 팔을 뻗고 ‘말’로써 “만세”를 외치는 행위에 남녀노소가 모두 참여했다. 그것은 한반도만의 사건이 아니었다. 같은 시기 베트남, 중국, 인도, 중동, 라틴아메리카 등에서 비슷한 성격의 ‘탈식민 운동’이 ‘동시적’으로 움텄다. 그러나 폭력적 억압을 경험하며 탈식민 운동은 좌우로 나뉘어졌고, 그 뒤 기나긴 ‘냉전’이 이어졌다.
“1919년은 무척 중요한 해이지만 세계 학계에서 아직 그 의미가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습니다. 그 의미를 어떻게 제대로 밝힐 것이냐가 앞으로 한국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2일 경기도 성남의 한 호텔에서 <한겨레>와 만난 권헌익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사회인류학)는 이렇게 말했다. 12~14일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주최하는 ‘세계한국학대회’ 참석차 귀국한 그는 이번 학술회의에서 1919년과 3·1운동의 의미에 주목하는 발표를 내놨다.
상해 대한적십자회가 발행한 소책자에 실렸던 3·1운동 사진. “단 한 사람도 무장하지 않았다”는 설명이 붙어있다. 출처 위키미디어 코먼스
권 교수는 “탈식민 운동이 움트던 1919년에, 유럽에서는 1차대전 이후 평화 담론을 구축하려 했던 ‘파리평화회담’이 열렸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이렇게 보면, 1919년은 ‘국가’가 주도하는 서구 세계의 ‘평화 담론’과 ‘남녀노소’가 외친 비서구 세계의 ‘평화 담론’이 교차했던 분기점인 셈이다. 그는 파리에서 권력 세계의 지도자들이 논했던 평화가 ‘위로부터의 평화’, ‘외교 행위로서의 평화’였다면, 한반도에서 민주적인 광장의 모습으로 외친 평화는 ‘아래로부터의 평화’, ‘사회적 실체로서의 평화’라고 본다. 만약 전자를 “실패한 평화의 역사”로 평가한다면, 후자에 주목하는 ‘평화연구’는 “세계사적 의미를 지닌, 한국학의 중요한 과제”가 될 터다.
서구에서는 냉전을 ‘평화로운 시대’로 기억하지만, 비서구 세계에서 냉전은 실질적인 폭력으로 점철된 시대였다. 이 불균형에 대한 문제의식은 인류학자로서 권 교수가 그동안 집중해온 베트남의 전쟁 경험 연구, ‘극장국가’로서 북한 체제의 성격 연구, 한국전쟁 연구 등에 핵심으로 자리잡았다. 그는 “이젠 서구 중심의 규정에서 벗어나 냉전을 딱부러지게 ‘지구적 내전’으로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래야 1919년의 세계사적 의미를 제대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1919년의 세계’, ‘1919년의 아시아’ 등을 가제로 삼는 저작도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1919년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여러 ‘탈식민 운동’ 가운데 3·1운동에 특히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권 교수는 ‘말’을 앞세우고 ‘평화’와 ‘광장’을 이뤘던 ‘남녀노소’를 3·1운동의 주된 요소로 꼽고, 이것은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상상하고 주장했던 ‘정치적 행동’(acta politca)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평가한다. “3·1운동 때 광장에 나선 사람들은 말을 함으로써 그것이 현실로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 ‘말이 내가 되고 우리가 되고 현실이 되고자 하는’ 열망을 드러냈습니다. 이것은 권력관계를 중시하는 접근법으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인간이 내보일 수 있는 가장 정치적인 행위입니다. 앞으로 평화운동은 이렇게 ‘말’을 중요하게 여기는 운동이 될 것입니다.”
제주 애월읍 하귀리 영모원에 세워진 위령단. 위령비 뒷면에는 “죽은 이는 부디 눈을 감고 산 자들은 서로 손을 잡으라”라는 글이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비서구 세계의 폭력적인 냉전 경험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사건은 바로 한국전쟁이다. 그동안 한국전쟁을 주된 연구 주제로 삼아온 권 교수는 공동 연구의 차원과 개인 연구의 차원에서 그 결과물을 각각 저작으로 펴낼 계획이다. 공동 연구의 결과물은 2022년께 케임브리지대 출판사에서 2~3권짜리 <한국전쟁 총서>(가제)로 펴낼 예정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내년 초 한국에서 번역 출간할 책을 집필 중인데, ‘전쟁과 가족’ 정도의 한국어 제목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과거 베트남 전쟁의 경험에 대한 연구와 비슷하게, 친족, 애도 등의 열쇳말로 한국전쟁의 경험을 깊이 파고들 계획이다. 권 교수는 과거 정병호 한양대 교수와 함께 북한의 ‘카리스마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분석한 책 <극장국가 북한>을 펴낸 바 있다. 그런 그에게 올해 남북·북미정상회담 등으로 급변하는 한반도 정세 속 북한 체제의 변화는 남다른 생각거리를 던질 터다. 그는 “결론 부분에서 ‘북한의 지도부가 혁명에 가까운 개혁을 직접 주도하지 않는 한 변화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봤는데, 지금까지의 상황은 그 말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최근 북한 매체에서는 ‘1950년 정신’을 자주 이야기하는데, 그것은 “한국전쟁 이후 파괴된 땅에서 기적적·혁명적으로 이뤄낸 경제 발전의 정신을 되새기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이런 북한의 개혁은 그동안 구축해온 ‘대중 동원의 스펙터클’로서의 ‘극장국가’ 체제를 무너뜨리겠지만, 경제적으로 인민을 만족시키는 새로운 유형의 권위를 얻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난 12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의 한 호텔에서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주최하는 ‘세계한국학대회’ 참석차 방한한 권헌익 영국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자신의 연구 내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올해 안식년을 맞은 권 교수는 당분간 한국에 머무르며 한반도의 변화를 가장 가까이에서 관찰할 계획이라 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책에서 ‘냉전의 끝’이라는 제목의 단락을 구상하고 있는데, 이것은 한국전쟁의 ‘종전’이 꼭 이뤄져야만 쓸 수 있습니다. 만약 그런 단락을 쓸 수 있다면, 한반도의 냉전 경험은 세계사적으로 어떤 의미를 제시해야 하는가, 냉전 이후 북한의 경제발전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가, 자연과 지구환경의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남한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 등 ‘전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뤄보고 싶습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