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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억압을 푸르게 물리칠 시간

등록 2018-08-23 19:55수정 2018-08-23 20:12

[책과 생각] 양경언의 시동걸기
김승희, ‘솟구쳐 오르기 1’
<흰 나무 아래의 즉흥>(나남, 2014)

바위라고 해서 물로 구멍을 뚫을 수 없는 건 아니다. 한두 방울의 물이라면 바위 사이사이에 나 있는 조그만 틈에 고이는 정도겠지만, 그 물방울들이 오랜 시간을 거쳐 물줄기를 이룬다면 바위는 틀림없이 처음과는 다른 생김새가 될 것이다. 깎여나가고, 바뀔 것이다. 이는 그 어떤 권세를 누리고픈 자가 무시하고자 해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당연한 질서이다.

서울 도심의 한복판을 가득 채워 안희정 전 지사에 대한 법원의 1심 판결에 반발하고, ‘여성에겐 국가가 없다’고 외치며 국가는 여성에게 공정해야 한다고 요구했던 절박한 목소리들이 언젠가는 앞서 언급한 ‘당연한’ 사실을 역사의 현장에서 이룰 것이라 믿는다. 그 목소리들을 떠올리며 오늘의 시를 읽는다. 같은 구절이 나란히 서 있는 이 시의 원래 형태를 상상하며 읽다보면 글자들이 마치 물줄기처럼 벼랑 위에서도 겁내지 않고 기꺼이 점프를 하는 듯 느껴진다.

“억압을 뚫지 않으면/ 억압을/ 억압을/ 억압을// 악업이 되어/ 악업이/ 악업이/ 악업이// 두려우리라// 절벽 모서리에 뜀틀을 짓고/ 절벽의 모서리에 뜀틀을 짓고/ 내 옆구리를 찌른 창을 장대로 삼아/ 하늘 높이/ 장대높이뛰기를 해보았으면// 눈썹이 푸른 하늘에 닿을 때까지/ 푸른 하늘에 속눈썹이 젖을 때까지// 아, 삶이란 그런 장대높이뛰기의 날개를/ 원하는 것이 아닐까,/ 상처의 그물을 피할 수도 없지만/ 상처의 그물 아래 갇혀 살 수도 없어// 내 옆구리를 찌른 창을 장대로 삼아/ 장대높이뛰기를 해보았으면/ 억압을 악업을/ 그렇게 솟아올라/ 아, 한 번 푸르게 물리칠 수 있다면”(김승희, ‘솟구쳐 오르기 1’ 전문)

시는 억압의 창이 옆구리를 찌를 때 그것을 그대로 두면 상처가 썩어나갈 뿐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 같다. 반복되는 억압은 더 큰 악업을 불러올 뿐이라고. 그러니 이를 “푸르게 물리”치고자 하는 시의 바람은 고통과 긴장의 시간을 뚫고 뛰어오를 도약의 순간을, 또는 바위의 모양새조차 바꿔낼 언젠가를, 끈질기게 추구할 줄 아는 시인의 심지에서 발아한 것이겠다.

1심 판결을 처음 들었을 때, 법제도의 편향적인 해석과 판단에 실망을 금치 못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참담한 기분이 든다는 얘기를 나눴었다. 참담에서 그칠 수 없을 일이다. 많은 논자들이 판결의 부당함을 짚기도 했거니와, 제도의 언어가 굼뜨게도 포착하지 ‘않으려 하는’ 사회 구성원들의 감수성은 강자에게만 유리하게 집행되는 법질서로 운영되는 억압적인 사회가 변화해야 한다고 목청껏 말하고 있다.

김지은 씨의 ‘살아내고 싶다’, ‘살고 싶다’는 발언은 온갖 권력의 억압에 억눌리면서도 참된 사람의 방식으로 이 땅을 일구어왔던 이들이 가장 많이 외쳤던 말이기도 하다. 억압을, 악업을, 푸르게 물리치는 시간은 이미 솟구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살아서 바위를 뚫을 것이다. 김지은 씨와, 숱한 성폭력·위계폭력에도 살아남은 이들의 계속되는 삶을 지지한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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