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 걸기
안희연, ‘슈톨렌-현진에게’, <현대문학> 2017년 1월호
소설가 김금희 선생님과 작품 속 인물에 대한 대화를 나누다가, 살면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때 꼭 떠올려야지 싶은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상상할 때 그 사람의 절망만을 그려본다고 해서 그이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 그이가 맞이했던 환희의 순간까지 헤아릴 수 있어야 그 사람과 비로소 ‘사람'으로 마주할 수 있다는 것. 바닥으로 떨어져 숨을 겨우 쉬며 살아가는 이에게도 고개를 들고 상공을 올려다본 순간이 있을 것이고, 거기 구름에 깃든 빛이 그이의 얼굴에 기쁨을 채울 때 그이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계속해서 살아갈 힘을 만들어낼 것이다. 이는 누구나 저 자신을 일으켜 세울 힘이 제 안에 있다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생각인 듯했다. 어떤 사람을 절망의 후기로 기억할지, 아니면 희망의 서문으로 기억할지에 따라 그 사람 및 그이와 관계 맺는 나의 현재에 대한 판단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나는 방금의 얘기를 안희연의 시를 읽다가 다시 떠올렸다.
“건강을 조심하라기에 몸에 좋다는 건 다 찾아 먹였는데/ 밖에 나가서 그렇게 죽어 올 줄 어떻게 알았겠니.”/ 너는 빵*을 먹으며 죽음을 이야기한다/ 입가에 잔뜩 설탕을 묻히고/ 맛있다는 말을 후렴구처럼 반복하며// 사실은 압정 같은 기억, 찔리면 찔끔 피가 나는/ 그러나 아픈 기억이라고 해서 아프게만 말할 필요는 없다/ 퍼즐 한 조각만큼의 무게로 죽음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퍼즐 조각을 수천 수만 개 가졌더라도// 얼마든지 겨울을 사랑할 수 있다/ 너는 장갑도 없이 뛰쳐나가 신이 나서 눈사람을 만든다/ 손이 벌겋게 얼고 사람의 형상이 완성된 뒤에야 깨닫는다/ 네 그리움이 무엇을 만들었는지// 보고 싶었다고 말하려다가/ 있는 힘껏 돌을 던지고 돌아오는 마음이 있다/ 아니야, 나는 기다림을 사랑해/ 이름 모를 풀들이 무성하게 자라는 마당을 사랑해/ 밥 달라고 찾아와 서성이는 하얀 고양이들을/ 혼자이기엔 너무 큰 집에서/ 병든 개와 함께 살아가는 삶을// 펑펑 울고 난 뒤엔 빵을 잘라 먹으면 되는 것/ 슬픔의 양에 비하면 빵은 아직 충분하다는 것/ 너의 입가엔 언제나 설탕이 묻어 있다/ 아닌 척 시치미를 떼도 내게는 눈물 자국이 보인다/ 물크러진 시간은 잼으로 만들면 된다/ 약한 불에서 오래오래 기억을 졸이면 얼마든 달콤해질 수 있다”
*슈톨렌: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매주 한 조각씩 잘라 먹는 기다림의 빵.(안희연, ‘슈톨렌-현진에게’ 전문)
다른 사람과 관계 맺을 때 뿐일까. 이 시에는 자신의 옛 시절에 대한 슬픈 기억을 어떻게 남길지에 따라 현재를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이의 강인한 명랑이 있다. 그러기까지 어마어마한 분투를 스스로 치렀을 테지만, 바로 그와 같은 시간을 통과한 자이기에 자기연민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사랑을 두 팔로 만들어낼 줄 아는 것. 그러니 “슬픔의 양에 비해” 삶이 아직 충분한 우리여, 우리는 이 겨울을 어떻게 건너갈까.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양경언 문학평론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