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원근의 출판 풍향계
올해도 대다수 출판사들에는 어려운 한 해였다. 도매업체 송인서적의 부도라는 대형 악재까지 겹쳤다. 경영난 타개를 위해 출판사들은 종이책 판매의 침체를 보전하기 위한 굿즈(책 관련 상품) 기획 등에 더욱 공을 들이고 있다. 그렇지만 정공법은 아니다. 독자와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제안하는 출판사들의 사례가 이를 뒷받침한다.
한국 문학을 떠받쳐 온 대들보 중 하나인 출판사 창비는 올해 4월 ‘디지털 시대의 시 플랫폼’을 표방하는 시 전문 앱 <시요일>을 선보였다. 스마트폰처럼 신체 밀착형 디지털 기기들이 범람하는 매체 환경에서, 시의 디지털화와 데이터베이스화를 통해 독자와 만나려는 시도다. 창비에서 발간한 시 3만4000여 편을 검색해 읽을 수 있고, ‘오늘의 시’ 추천, 낭송, 소셜 미디어 공유 등 다양한 기능을 갖췄다. 앱 서비스 시작 6개월 만에 10만 명을 돌파한 이용자 수는 12월 말 현재 13만 명을 기록하며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오늘의 시’에 소개된 시는 해당 시가 수록된 종이 시집의 판매로도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창비는 앞으로 방대한 옛 시를 포함하고, 독자 참여 공간을 넓힌 다양한 서비스로 확대하는 등 끊임없는 진화를 모색하고 있다. 독자들이 원하는 시로만 엮은 맞춤형 종이 시집을 만들어주는 서비스도 조만간 시작한다. 시 플랫폼의 역할을 키우기 위해 다른 출판사들의 참여도 기대한다. 이러한 창비의 움직임은 디지털 시대에 시를 출판하는 출판사의 비즈니스 모델로는 세계적인 모범에 해당할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커뮤니케이션북스는 올해 3월에 <100인의 배우, 우리 문학을 읽다>라는 제목으로 한국 근현대 문학의 정수와 만날 수 있는 ‘듣는 책’(오디오북)을 선보였다. 유명 배우들의 목소리로 중단편 소설 100편을 낭독했다. 한국연극인복지재단이 낭독 배우의 섭외를 맡고, 한국교육방송(EBS)이 녹음과 방송, 출판사가 작품 선정과 듣는 책 제작을 맡은 협업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전체 분량은 104시간이 넘는데, 매일 3시간 30분씩 한 달간 들어야 할 분량이다.
작품은 시디(CD)를 사거나 음원을 다운로드하여 스마트폰으로 들을 수 있으며, 음원은 한 편당 990원으로 저렴하다. 전체 작품을 담아 8월에 나온 유에스비(USB) 메모리는 7만 원의 가격대에도 불구하고 현재 판매량이 4천여 개를 돌파했다. 부모님 선물용이나 가족과 함께 듣는 용도로 인기가 있다고 한다. 1000종 이상의 자사 종이책을 듣는 책으로 만든 출판사의 내공과 추진력이 빛을 발한 것이다.
출판뿐 아니라 대부분의 콘텐츠 사업은 점차 플랫폼 비즈니스로 변모하고 있다. 출판 선진국들에서 충분히 검증된 듣는 책 사업은 한국 출판의 차세대 성장동력 중 하나다. 창비와 커뮤니케이션북스는 자사의 콘텐츠와 기획력으로 이를 입증했다. 출판계에서 독자를 만들고 독자와 만나는 새로운 방식에 대한 고민이, 굿즈에 대한 고민보다 더 많아지기를 바란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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