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 걸기]
김학중, ‘강을 굽다’
<창세>(문학동네, 2017) 관용어가 새삼스러울 때가 있다.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에도 그 말이 생겨나기까지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나, 사람들이 어떻게 그 표현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골몰하다보면 ‘왜 꼭 그 표현일까’ 싶은 호기심이 일기도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표현도 그렇다. 추상적인 ‘시간’이란 개념 옆에 왜 ‘흐른다’는 말을 두었을까. ‘흐름’이 갖춘 운동적인 속성을 떠올리면, 우리는 어쩌면 매 순간 방금과는 다른 다음에 이르기를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얼마만큼 나아갔고 나아가고자 한 거리만큼 스스로를 잘 감당하며 살았나. 나는 강물이 흘러가듯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나. 이는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시간’이란 말을 할 수 있는 한 잘 부여잡아 조물조물 주물러도 보고 깎아내기도 하면서 제법 괜찮은 꼴의 무언가로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우리를 찾아오기에 갖는 질문들일 것이다. 김학중 시인의 ‘강을 굽다’는 도자기를 굽는 사람의 손끝에서 흐르는 강(江)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그린다. 이는 시를 읽다보면 완성품으로서의 도자기와 거기에 새겨진 물결무늬가 구분되어 읽히지만은 않는다는 얘기다. 오히려 도자기가 곧 강이고 강이 곧 도자기인 세계를 시인이 발견한 것 같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런 세계에선 흐르는 강을 굽는 행위란 곧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제멋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조심스레 ‘삶’으로 빚어내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힘차다/ 빛을 받은 물비늘 너머로 희미하게/ 조약돌이 보일 듯 깊지도 얕지도 않은 강/ 물살은 방금 방생한 치어처럼 가쁘게/ 그 모가지를 확 잡아챈 병목 아래에서/ 선 채로 바둥거리는 강. 누군가/ 강을 구웠다. 가마 안의 열기만으로/ 강물을 붙잡았을까. 모를 일이다/ 물레 위에서 물결 안에/ 내면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손을/ 미끈거리는 날것을 붙잡으려 할수록/ 자꾸 새어나갔을 물결. 손가락 사이에서/ 격한 물소리가 났을 것이다. 그 소리에/ 베었을 것이다. 대지가/ 끌어안고 있는 강을 구우려 하다니/ 태초부터의 불경을 잇고 있는 자여/ 물소리에 베인 손가락은 물결의 내면에/ 가라앉았을까. 도자기가 순간 웅크린다/ 살의를 가진 짐승처럼 노려보는 강/ 누군가 흐르는 강을 구웠다. 그는 없고/ 도자기 하나만이 남아 있다. 그 아래/ 병을 떠받치고 있는 손이 있다/ 유약이 잘 발린 손이 있다/ 강이 천천히 굽이친다.”(김학중, ‘강을 굽다’ 전문) “흐르는 강”을 굽는 상황이 시간을 상대하며 사는 삶에 빗대어질 때 우리가 이르는 종착지는 고작해야 “도자기 하나” 크기 정도의 자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설혹 잘 빚은 도자기가 아니라 잘 빚은 불행일지라도 혹은 제대로 빚지 못해 어딘가 금이 났을지라도 도자기가 남겨지기까지의 시간이 있었으므로, 그 자리는 누구의 손으로라도 떠받쳐 마땅한 것이 된다. 그러니 이 시를 읽은 오늘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는 말 대신에 ‘시간을 굽다’는 표현에 기대어 삶을 빚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도 될 것 같다. 끊임없이 살아 있으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해주어도 될 것 같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창세>(문학동네, 2017) 관용어가 새삼스러울 때가 있다. 일상에서 흔히 쓰이는 말에도 그 말이 생겨나기까지 저마다의 역사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으나, 사람들이 어떻게 그 표현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에 골몰하다보면 ‘왜 꼭 그 표현일까’ 싶은 호기심이 일기도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는 표현도 그렇다. 추상적인 ‘시간’이란 개념 옆에 왜 ‘흐른다’는 말을 두었을까. ‘흐름’이 갖춘 운동적인 속성을 떠올리면, 우리는 어쩌면 매 순간 방금과는 다른 다음에 이르기를 기대하며 사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는 얼마만큼 나아갔고 나아가고자 한 거리만큼 스스로를 잘 감당하며 살았나. 나는 강물이 흘러가듯 끊임없이 살아 움직이고 있나. 이는 해마다 이맘때쯤이면 ‘시간’이란 말을 할 수 있는 한 잘 부여잡아 조물조물 주물러도 보고 깎아내기도 하면서 제법 괜찮은 꼴의 무언가로 만들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우리를 찾아오기에 갖는 질문들일 것이다. 김학중 시인의 ‘강을 굽다’는 도자기를 굽는 사람의 손끝에서 흐르는 강(江)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그린다. 이는 시를 읽다보면 완성품으로서의 도자기와 거기에 새겨진 물결무늬가 구분되어 읽히지만은 않는다는 얘기다. 오히려 도자기가 곧 강이고 강이 곧 도자기인 세계를 시인이 발견한 것 같다고 해야 맞을 것이다. 이런 세계에선 흐르는 강을 굽는 행위란 곧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제멋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조심스레 ‘삶’으로 빚어내는 행위와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힘차다/ 빛을 받은 물비늘 너머로 희미하게/ 조약돌이 보일 듯 깊지도 얕지도 않은 강/ 물살은 방금 방생한 치어처럼 가쁘게/ 그 모가지를 확 잡아챈 병목 아래에서/ 선 채로 바둥거리는 강. 누군가/ 강을 구웠다. 가마 안의 열기만으로/ 강물을 붙잡았을까. 모를 일이다/ 물레 위에서 물결 안에/ 내면을 만들어내는 사람의 손을/ 미끈거리는 날것을 붙잡으려 할수록/ 자꾸 새어나갔을 물결. 손가락 사이에서/ 격한 물소리가 났을 것이다. 그 소리에/ 베었을 것이다. 대지가/ 끌어안고 있는 강을 구우려 하다니/ 태초부터의 불경을 잇고 있는 자여/ 물소리에 베인 손가락은 물결의 내면에/ 가라앉았을까. 도자기가 순간 웅크린다/ 살의를 가진 짐승처럼 노려보는 강/ 누군가 흐르는 강을 구웠다. 그는 없고/ 도자기 하나만이 남아 있다. 그 아래/ 병을 떠받치고 있는 손이 있다/ 유약이 잘 발린 손이 있다/ 강이 천천히 굽이친다.”(김학중, ‘강을 굽다’ 전문) “흐르는 강”을 굽는 상황이 시간을 상대하며 사는 삶에 빗대어질 때 우리가 이르는 종착지는 고작해야 “도자기 하나” 크기 정도의 자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설혹 잘 빚은 도자기가 아니라 잘 빚은 불행일지라도 혹은 제대로 빚지 못해 어딘가 금이 났을지라도 도자기가 남겨지기까지의 시간이 있었으므로, 그 자리는 누구의 손으로라도 떠받쳐 마땅한 것이 된다. 그러니 이 시를 읽은 오늘 우리는 ‘시간이 흐른다’는 말 대신에 ‘시간을 굽다’는 표현에 기대어 삶을 빚어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도 될 것 같다. 끊임없이 살아 있으라고 자기 자신에게 말해주어도 될 것 같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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