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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문체부는 영리했고 출판계는 무기력했다

등록 2017-11-30 19:45수정 2017-11-30 20:29

[백원근의 출판 풍향계]
지난 11월21일은 개정 도서정가제가 시행 3주년을 맞은 날이었다. ‘3주년’이 의미가 있는 것은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3년마다 도서정가제를 재검토”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3주년이고 뭐고 문체부는 보도자료 한 장 내놓지 않았다. 묵언으로 ‘현행 유지’ 방침을 말한 것인데, 법에 정해놓은 정책을 이렇게 암암리에 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문체부는 2017년 1월말에 ‘도서정가제 보완·개정 협의회’를 구성했다. 5월까지 10차례 회의를 거쳐 8월25일 민간단체들 사이에 합의서가 작성됐다. 합의서에는 정책 주체인 문체부가 빠졌다. 현행 할인율을 유지하되 “3년 또는 5년 후 재검토”하며, 제3자 할인 문제와 전자책 대여 등 여러 쟁점 사항은 당사자 간 자율협약에 맡긴다는 내용이었다. 나아가 협약 내용은 밀약처럼 어디에도 공표되지 않았다. 더구나 ‘5년 후 재검토’라니, 초법적인 발상이다. 문체부는 공개 토론회 한 번 개최하지 않았을 만큼 공론의 장을 기피했다.

위 협의체에는 출판계(2개), 온·오프라인 유통계(4개), 소비자(2개) 등 모두 8개 단체가 참여했다. 국민을 대신한 기관 구매자인 도서관을 대표하는 단체, 시민의 독서 생활화를 위해 힘쓰는 독서 시민단체는 협의체에서 배제되었다. 공공재 성격을 가진 책 생태계의 기본 정책을 논의하기 위한 제대로 된 협의체라고 보기 어려운 이유다. 사업자·소비자 논리만 충돌하는 협의체에서 논의의 진전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내용 없는 합의를 끌어낸 문체부는 영리했고, 출판·서점계는 인터넷서점과 소비자 단체 앞에서 무기력했다.

유명무실한 재정가 책정의 행정 처리 기한이 단축된 것 말고는 바뀐 게 없는 현행 도서정가제는 인터넷서점에게만 유리하다. 15%의 직간접 할인은 할인을 염두에 둔 거품가격을 ‘소비자를 위해’ 할인한다는 시늉을 하는 것이다. 그나마 자본력이 있고 출판사 공급률이 낮은 인터넷서점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현행 도서정가제는 다양한 서점이 함께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정가와 판매가의 차이를 구매자에게 각인시켜 인터넷서점만 밀어주는 폭력적인 제도다. 인터넷서점은 ‘15% 기본 할인’에 ‘제휴카드 30% 청구할인’, ‘각종 무료 쿠폰 제공’, ‘전자책 반값 10년 대여’ 등이 모두 가능한 반면, 지역 서점이나 특성화 서점은 할인이 없거나 미미해 도태되도록 하는 것이 이 땅의 문화정책이다. 일자리 창출, 지방 분권, 지역문화를 강조하는 정부 정책 기조는 어디로 갔는가.

참된 도서정가제는 동일한 책이면 누구나 같은 가격으로 구입할 권리를 부여한다. ‘할인’이란 말속임의 거품가격을 없애고, 방방곡곡에 서점 수를 늘리며, 소형 출판사의 존립 가능성을 높여 독자가 원하는 다양한 책이 생산되도록 할 수 있다. 소수 언어권 출판 선진국들에서 핵심 정책 구실을 하는 이유다. 책 생태계와 문화의 바탕인 참된 도서정가제를 만드는 일에 문재인 정부가 끝내 고개 돌리지 않기를 바란다.

백원근 책과사회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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