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심장이 뛰는 것에 충실하라

등록 2017-11-23 19:50수정 2017-11-23 20:28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영원의 시간을 여행하다
호시노 미치오 지음, 이규원 옮김/청어람미디어(2017)

어떤 이야기를 읽으면서 잠시 숨을 못 쉬는 경험을 한다면, 시간이 정지되고 주위가 고요해지는 경험을 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도움이 될까?

1973년 직전 호시노 미치오는 도쿄의 서점에서 <알래스카>라는 서양 원서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 책에 실린 알래스카 쉬스마레프 마을의 작은 사진에 매료된다. 그는 쉬스마레프 마을에 엽서를 보낸다. ‘촌장님께, 저는 일본에 사는 호시노 미치오라는 스무살 대학생입니다. 저는 알래스카의 대자연이나 야생동물에 관심이 많습니다. 올 여름 알래스카에 갈 예정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곳에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괜찮으시다면 저를 받아줄 가족을 소개해 줄 수 있을는지요.’ 반년 뒤 그는 쉬스마레프 마을에서 답장을 받는다. “우리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1973년 알래스카를 찾아간 이후 1996년 8월 43세가 되던 해 쿠릴호반에서 불곰에 물려 죽을 때까지 그가 본 풍경과 겪은 일들은 남에게 들은 것들이 아니다. 하와이에서 겨울을 난 흑고래는 4천 킬로미터를 여행해서 먹을 것을 구하러 알래스카로 온다. 그 흑고래들은 버블넷 피딩이라고 하는 신비로운 먹이활동을 한다. 청어떼를 발견한 흑고래는 그 밑을 나선형으로 선회해서 거품을 뿜어내고 그 거품은 원기둥 모양의 벽이 된다. 청어는 가짜 원기둥에 갇힌다. 거품을 무서워하는 청어는 가짜 벽을 뚫지 못하고 그때 흑고래가 아가리를 벌리고 솟구쳐 올라 청어를 먹는다.

이 먹이행동 전에 신비로운 일이 일어난다. 우두머리가 중심이 되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어느해 호시노는 흑고래 일곱 마리를 발견했다. 그는 수중마이크를 바닷속에 넣고 헤드폰을 썼다. 바다에서 쥐어짜내는 듯한 구슬픈 노래 소리가 들렸다. 호시노는 소리를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 내 밑에서 흑고래들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이듬해 호시노는 다시 청어떼를 쫓는 흑고래 다섯 마리를 만났다. 그는 고무보트의 엔진을 끄고 원기둥을 기다렸다. 그런데 놀랍게도 원이 청어떼가 아니라 호시노가 탄 고무보트를 에워싸며 떠오르는 것 아닌가! 수면 아래에 고래의 거대한 그림자가 보였다. 피할 시간은 없었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 고래들은 솟구치기 직전에 원 밖으로 빠져나갔다. 온몸의 힘이 빠진 호시노는 눈앞에서 숨을 뿜어대는 거대한 생물을 망연자실 지켜보았다. 버블넷 피딩은 굉장한 먹이 활동이지만 그것을 순간적으로 멈춘 흑고래들의 행동을 언제까지고 잊을 수 없다고 호시노 미치오는 쓰고 있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이런 이야기를 기다리고, 찾고 있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숨막히게 아름답고 믿을 수 없이 경이롭다고 느끼고 그렇다면 그 결코 잊을 수 없는 이야기 속에서 아직 살아 있는 나는 어떻게 살아볼 것인가? 호시노 미치오의 모든 글과 사진은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한다. ‘어떻게 살아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영원한 시간 속을 걸어본 호시노 자신은 글로 표현한 적이 있을까.

나는 책장을 핥을 듯이 뒤져본다. 그리고 너무나 많은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최초에 매료되었던 풍경에서 출발해서 자신의 인생길을 만들어 내는 순수함, 진짜로 뭔가에 인생을 걸 줄 아는 용기와 대담함, 그리고 심장이 뛰는 것에 충실한 꿈. 그는, 자연은 너무나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사진과 글은 항상 두 가지가 함께 있다. 고독, 그리고 온기. 자연인 우리도 이렇게 균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경이롭게, 고독과 온기를 함께 품고.

정혜윤 (시비에스) 피디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민희진, 디스패치 기자 고소… “지속적으로 거짓 사실을 기사화” 1.

민희진, 디스패치 기자 고소… “지속적으로 거짓 사실을 기사화”

‘창고 영화’ 다 털어냈더니…내년 극장가 빈털터리 될 판 2.

‘창고 영화’ 다 털어냈더니…내년 극장가 빈털터리 될 판

“하도 급해서 서둘렀다…이승만 존경하는 분들 꼭 보시라” 3.

“하도 급해서 서둘렀다…이승만 존경하는 분들 꼭 보시라”

‘정년이’ 큰일 했다…여성국극 연일 매진, 신작 제작도 활발 4.

‘정년이’ 큰일 했다…여성국극 연일 매진, 신작 제작도 활발

마산 앞바다에 비친 ‘각자도생 한국’ [.txt] 5.

마산 앞바다에 비친 ‘각자도생 한국’ [.txt]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