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 걸기]
김행숙, ‘잠의 방언’, <에코의 초상>(문학과지성사, 2014) 이년 전, 스웨덴의 어느 전시장에서 잠든 아이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숲속에서 혹은 어느 건물 구석이나 덤불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잠든 이들 특유의 고요한 기쁨이 아이의 표정에 충만한 까닭에 연출 사진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그 작품은 실은 난민 아이들의 밤을 담은 것이었다. 그 사진만으로는 당장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잃은 이들의 처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잠자리가 마련되기까지 그날 아이들이 거쳐야 했을 험한 노정이나 그들이 견뎌야 했을 메마른 시선도 겨우 짐작만 할 뿐이다. 우리가 사진을 통해 봐야만 하는 것이 비단 사진으로 제출된 ‘편집된 대상’뿐만이 아니라 그 프레임을 만든 ‘사진 바깥의 맥락’이어야 한다면, 내가 아무리 아이들의 하루 중 일부를 눈앞에 두었다 하더라도 저들의 현실을 제대로 봤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그 맥락을 직시한다 하더라도, 제시된 이미지가 난민을 심미적인 소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 역시도 쉽게 거둘 수 없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붕 하나 없이 잠든 저들의 얼굴에 유일하게 찾아온 평화의 순간을 나는 믿고 싶었다. 그때야, 난민 아이들이 어떻게 잠을 자며 삶을 이어가는지에 대한 상상을 해본 적이 내게 단 한번도 없었음을 깨달았을 때야, 비로소 실감할 수 있는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은 목소리를 잃어버려서 기침 소리가 없는 기침 같고,/ 바람 소리가 없는 바람 같고,/ 잠은 시력을 잃어버려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보는 것 같고/ 검은 유리창처럼 창밖에서 나를 나누어 가지는 것 같고,/ 내가 나누어지고 나누어지는 것은 잠 속에서 잠을 자는 것 같고,/ 잠은 목격자가 실종된 사건 같고,/ 잠은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저편의 전화기 같고,/ 아직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자가 허공에 대고 웅얼거리는 입술 같고,/…(중략)…/ 다시 리셋 버튼을 누르는 누군가의 손가락에 뼈가 없는 것 같고, 그것은 안개의 뼈 같고,/ 철문 밖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친 것 같고, 지쳐서 잠드는 것 같고,”(김행숙, ‘잠의 방언’ 부분)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명백한 세계와 단절을 해야만 빠져들 수 있는 공간이 잠의 세계다. 깨어 있을 때와는 다른 형태가 보이고 다른 소리가 들리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는 건 잠의 세계에선 당연한 일이 된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등을 돌린 채 자신만의 질서로 움직일 수 있는 곳,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단독자로서 움직일 수 있는 아이러니가 통용될 수 있는 그런 곳, 잠의 세계로의 입장은 한 사람이 온전하게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 자리가 훼손되지 않을 때 가능한 일이다. 잠든 사람의 얼굴에 깃든 충만함은 그러므로 도무지 충만할 수 없는 삶이 충만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기 위한 시간이 만드는, “소리가 없는” 주장의 형태일 수 있다. 김행숙의 시를 지금 이 시간에도 잠들 자리를 찾아 정처 없이 헤매고 있을 이들을 떠올리며 읽었다. 이 같은 읽기가 긴장을 야기하는 전쟁 위협을 비판하는 이유 역시도 되었으면 좋겠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김행숙, ‘잠의 방언’, <에코의 초상>(문학과지성사, 2014) 이년 전, 스웨덴의 어느 전시장에서 잠든 아이들의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숲속에서 혹은 어느 건물 구석이나 덤불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잠든 이들 특유의 고요한 기쁨이 아이의 표정에 충만한 까닭에 연출 사진으로 오해를 살 수도 있을 그 작품은 실은 난민 아이들의 밤을 담은 것이었다. 그 사진만으로는 당장 어디로 가야 하는지 방향을 잃은 이들의 처지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잠자리가 마련되기까지 그날 아이들이 거쳐야 했을 험한 노정이나 그들이 견뎌야 했을 메마른 시선도 겨우 짐작만 할 뿐이다. 우리가 사진을 통해 봐야만 하는 것이 비단 사진으로 제출된 ‘편집된 대상’뿐만이 아니라 그 프레임을 만든 ‘사진 바깥의 맥락’이어야 한다면, 내가 아무리 아이들의 하루 중 일부를 눈앞에 두었다 하더라도 저들의 현실을 제대로 봤다고 말할 수 없는 일이다. 하물며 그 맥락을 직시한다 하더라도, 제시된 이미지가 난민을 심미적인 소비 대상으로 삼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 역시도 쉽게 거둘 수 없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붕 하나 없이 잠든 저들의 얼굴에 유일하게 찾아온 평화의 순간을 나는 믿고 싶었다. 그때야, 난민 아이들이 어떻게 잠을 자며 삶을 이어가는지에 대한 상상을 해본 적이 내게 단 한번도 없었음을 깨달았을 때야, 비로소 실감할 수 있는 현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잠은 목소리를 잃어버려서 기침 소리가 없는 기침 같고,/ 바람 소리가 없는 바람 같고,/ 잠은 시력을 잃어버려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다시 보는 것 같고/ 검은 유리창처럼 창밖에서 나를 나누어 가지는 것 같고,/ 내가 나누어지고 나누어지는 것은 잠 속에서 잠을 자는 것 같고,/ 잠은 목격자가 실종된 사건 같고,/ 잠은 일방적으로 끊어버린 저편의 전화기 같고,/ 아직 수화기를 붙들고 있는 자가 허공에 대고 웅얼거리는 입술 같고,/…(중략)…/ 다시 리셋 버튼을 누르는 누군가의 손가락에 뼈가 없는 것 같고, 그것은 안개의 뼈 같고,/ 철문 밖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 지친 것 같고, 지쳐서 잠드는 것 같고,”(김행숙, ‘잠의 방언’ 부분) 눈을 떴을 때 보이는 명백한 세계와 단절을 해야만 빠져들 수 있는 공간이 잠의 세계다. 깨어 있을 때와는 다른 형태가 보이고 다른 소리가 들리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는 건 잠의 세계에선 당연한 일이 된다.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등을 돌린 채 자신만의 질서로 움직일 수 있는 곳, 몸을 움직이지 않고서도 단독자로서 움직일 수 있는 아이러니가 통용될 수 있는 그런 곳, 잠의 세계로의 입장은 한 사람이 온전하게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 자리가 훼손되지 않을 때 가능한 일이다. 잠든 사람의 얼굴에 깃든 충만함은 그러므로 도무지 충만할 수 없는 삶이 충만해질 때까지 “기다리고 기다리”기 위한 시간이 만드는, “소리가 없는” 주장의 형태일 수 있다. 김행숙의 시를 지금 이 시간에도 잠들 자리를 찾아 정처 없이 헤매고 있을 이들을 떠올리며 읽었다. 이 같은 읽기가 긴장을 야기하는 전쟁 위협을 비판하는 이유 역시도 되었으면 좋겠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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