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걸기
신해욱 ‘놓고 온 것들’
릿터 2017년 4-5월호 ‘아사히 비정규직지회’는 외국인투자기업 ‘아사히글라스’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만든 노동조합으로 구미공단에서는 최초로 설립된 비정규직 노동조합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제 권리를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노동조합이지만, 170명의 조합원들은 노조를 만든 지 한 달 만에 문자로 해고통보를 받았다.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노동자들은 그날부터 공장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회사의 희망퇴직 회유와 농성장 강제철거 등의 시련을 겪기도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스물두 명의 조합원들은 2016년 하반기 전국에서 타오른 촛불의 행렬에 함께하면서 광장의 힘을 이어가기 위해 2017년 4월14일부터 5월10일까지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외치며 고공농성에 참여했고, 오늘까지도 투쟁을 이어감으로써 촛불의 열기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 수 있도록 전력을 쏟는 중이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꽃 공단에 피다>(한티재, 2017)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장기간의 싸움을 이어가면서도 위축되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자신의 움직임이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내리란 믿음을 잃지 않는 내용을 직접 써내려간 이들의 시간이 애틋했지만, 무엇보다도 내 시선은 조합원 개개인이 여태껏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구체적으로 소개한 지면에 오래 머물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은 언제 태어났고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가족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떤 경로로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어떤 바람을 품고 사는지에 관해 각자의 방식대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걸 읽노라니 이들이 회사가 대우하듯 ‘없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내 주위 ‘아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활자가 채 전달하지 못한 분명하고 입체적인 삶이 거기엔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이들은 싸움의 과정에서 남겨진 사람들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남아,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위한 씨앗을 틔우는 사람들. “남아 있습니다.// 남은 시간. 남은 음식. 부서진 비스킷의 무수한 부스러기.// 남아 있습니다.// 남은 소리. 남은 구멍. 여집합에 시달리는 타원의 밝은 윤곽.//** 동지들. 밤은 온다.// 또 온다.// 자꾸 온다.// 죽을 때까지 오게 되어 있다, 봐주지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남은 은총. 남은 손톱. 나타냄의 표시를 더 많이 가진 머리카락.”-신해욱, ‘놓고 온 것들’ 전문(이탤릭체 부분은 오른쪽 정렬로 되어 있는데 지면상 표기하지 못했다) ‘남아 있는’ 것이란 누군가가 어떤 연유로 ‘놓고 간’ 것이기도 하지만, 남아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멈추고 싶다 해도) 멈출 수 없는 삶의 순간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들이기도 하다. 남은 것들이 있으므로, 계속되는 것들이 있다. 그러니 동지들, 밤은 자꾸 오지만 우리에겐 남은 자리를 감싸는 “타원의 밝은 윤곽”이 또한 쥐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 무엇도 찬탈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분명한 삶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신해욱 시에 드나드는 문은 여러 군데에 있지만 오늘은 이 땅의 남아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읽었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릿터 2017년 4-5월호 ‘아사히 비정규직지회’는 외국인투자기업 ‘아사히글라스’의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만든 노동조합으로 구미공단에서는 최초로 설립된 비정규직 노동조합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당당하게 제 권리를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노동조합이지만, 170명의 조합원들은 노조를 만든 지 한 달 만에 문자로 해고통보를 받았다. 그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노동자들은 그날부터 공장 앞에서 농성을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회사의 희망퇴직 회유와 농성장 강제철거 등의 시련을 겪기도 한다. 현재 남아 있는 스물두 명의 조합원들은 2016년 하반기 전국에서 타오른 촛불의 행렬에 함께하면서 광장의 힘을 이어가기 위해 2017년 4월14일부터 5월10일까지 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외치며 고공농성에 참여했고, 오늘까지도 투쟁을 이어감으로써 촛불의 열기가 우리의 일상 곳곳에 스며들 수 있도록 전력을 쏟는 중이다. 나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꽃 공단에 피다>(한티재, 2017)라는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장기간의 싸움을 이어가면서도 위축되는 마음을 다잡으면서 자신의 움직임이 더 나은 내일을 만들어내리란 믿음을 잃지 않는 내용을 직접 써내려간 이들의 시간이 애틋했지만, 무엇보다도 내 시선은 조합원 개개인이 여태껏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구체적으로 소개한 지면에 오래 머물렀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은 언제 태어났고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가족과는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떤 경로로 회사에서 일하게 되었는지, 어떤 바람을 품고 사는지에 관해 각자의 방식대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걸 읽노라니 이들이 회사가 대우하듯 ‘없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내 주위 ‘아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활자가 채 전달하지 못한 분명하고 입체적인 삶이 거기엔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자 이들은 싸움의 과정에서 남겨진 사람들이 아니라 여전히 ‘남아 있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남아,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위한 씨앗을 틔우는 사람들. “남아 있습니다.// 남은 시간. 남은 음식. 부서진 비스킷의 무수한 부스러기.// 남아 있습니다.// 남은 소리. 남은 구멍. 여집합에 시달리는 타원의 밝은 윤곽.//** 동지들. 밤은 온다.// 또 온다.// 자꾸 온다.// 죽을 때까지 오게 되어 있다, 봐주지 않는다.**// 알고 있습니다.// 남은 은총. 남은 손톱. 나타냄의 표시를 더 많이 가진 머리카락.”-신해욱, ‘놓고 온 것들’ 전문(이탤릭체 부분은 오른쪽 정렬로 되어 있는데 지면상 표기하지 못했다) ‘남아 있는’ 것이란 누군가가 어떤 연유로 ‘놓고 간’ 것이기도 하지만, 남아 있다는 그 이유만으로 (멈추고 싶다 해도) 멈출 수 없는 삶의 순간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것들이기도 하다. 남은 것들이 있으므로, 계속되는 것들이 있다. 그러니 동지들, 밤은 자꾸 오지만 우리에겐 남은 자리를 감싸는 “타원의 밝은 윤곽”이 또한 쥐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 무엇도 찬탈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분명한 삶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신해욱 시에 드나드는 문은 여러 군데에 있지만 오늘은 이 땅의 남아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며 읽었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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