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경언의 시동詩動걸기
연애의 책
유진목 지음/삼인(2016) 길 한복판에 있다 해도 서 있는 그곳이 사방이 막혀 있는 자리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제아무리 ‘광장’에 있다 할지라도, 이름 모를 무수한 얼굴들 사이에 있느라 밀실에 갇혀 있느니만 못한 고립을 느끼는 날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 날이면 나는 영원히 어딘가의 ‘안’에 갇혀 있는 것 같고,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어딘가의 ‘밖’에 있는 것 같다. 내가 하는 말은 누군가의 귀에 가닿기도 전에 바닥 어딘가로 함부로 낙하하고,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살필 힘이 내게는 없으므로 나는 어떤 사람인지조차도 생각이 잘 안 난다. 사람은 어떻게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해지는 그런 날, 유진목의 시를 읽는다. “당신은 울다가/ 속옷을 벗다가// 선 채로 당신의 것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고집이 있고/ 언제나 조금씩은 더 머물러 있었다// 울지 말아요/ 이제 그만 들어와요// 마치 창문 밖에도 당신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일그러진 얼굴마저 당신이 지은 것 같았다// 그들이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으면 좋겠어// 밖에는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밖에는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창문으로 갔다”(유진목, ‘밖에는 사람들이 웃고 있다’ 전문). 지금 ‘당신’은 길 위에서 고립을 느끼는 중인가. 그런데도 당신은 우는 자신을 살피기보다 당장 자신을 해명할 말을 찾고 있나. 멀리 가지도 못한 채 자책하느라, 고개만 떨구고 있나. 그런 ‘당신’을 향해 ‘나’는 말한다. 울지 말라고, 스스로 설정한 ‘안’과 ‘밖’의 경계를 헤아리다 마음 다치지 말라고. 이제 그만 다른 곳으로 움직여도 된다고. 위의 시에서 ‘나’와 ‘당신’을 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읽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창문 밖’에 있는 ‘나’를 본다. 그때서야 내 표정이 어떤지도 보인다. 나는 ‘나’ 자신을 창문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나 자신을 의식하고 있으므로, 언젠가는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살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더군다나 나는 “밖에는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고 연거푸 두 번 말하고 있지 않나. 구절이 반복되는 와중에 모두가 나를 비웃는 것 같은 현재 상태를 설명하던 종결어미는 과거의 상황을 설명하는 종결어미로 건너가는 의미의 문을 연다. 나는 나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이는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바라보고, 종국에는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스스로 들어 올리는 고양의 계기를 얻는다. “일어나 창문으로” 가는 그 몸짓을 향해 우리는 수양(修養)의 과정이란 이름을 부여해도 되겠다. 얼마 전 유진목 시인이 참여하는 수업에서 한 독자가 시인에게 “사람을 싫어하는가?”라고 물었다. 시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 답을 결정하지 않고 생각의 여지를 마련함으로써 내내 자기 자신의 언어를 저울질하는 움직임, 물러나지 않은 그 자리에서 빚어내는 자존의 얼굴. 시인의 답을 들으면서 나는 문득 시로 사람을, 또한 삶을, 견딜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유진목 지음/삼인(2016) 길 한복판에 있다 해도 서 있는 그곳이 사방이 막혀 있는 자리처럼 여겨질 때가 있다. 제아무리 ‘광장’에 있다 할지라도, 이름 모를 무수한 얼굴들 사이에 있느라 밀실에 갇혀 있느니만 못한 고립을 느끼는 날이 있다는 얘기다. 그런 날이면 나는 영원히 어딘가의 ‘안’에 갇혀 있는 것 같고,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은 어딘가의 ‘밖’에 있는 것 같다. 내가 하는 말은 누군가의 귀에 가닿기도 전에 바닥 어딘가로 함부로 낙하하고, 내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살필 힘이 내게는 없으므로 나는 어떤 사람인지조차도 생각이 잘 안 난다. 사람은 어떻게 ‘사람’으로 있을 수 있는지 의아해지는 그런 날, 유진목의 시를 읽는다. “당신은 울다가/ 속옷을 벗다가// 선 채로 당신의 것을 내려다보았다// 당신은 고집이 있고/ 언제나 조금씩은 더 머물러 있었다// 울지 말아요/ 이제 그만 들어와요// 마치 창문 밖에도 당신이 서 있는 것 같았다/ 일그러진 얼굴마저 당신이 지은 것 같았다// 그들이 내게 미안하다고 말했으면 좋겠어// 밖에는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밖에는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나는 일어나 창문으로 갔다”(유진목, ‘밖에는 사람들이 웃고 있다’ 전문). 지금 ‘당신’은 길 위에서 고립을 느끼는 중인가. 그런데도 당신은 우는 자신을 살피기보다 당장 자신을 해명할 말을 찾고 있나. 멀리 가지도 못한 채 자책하느라, 고개만 떨구고 있나. 그런 ‘당신’을 향해 ‘나’는 말한다. 울지 말라고, 스스로 설정한 ‘안’과 ‘밖’의 경계를 헤아리다 마음 다치지 말라고. 이제 그만 다른 곳으로 움직여도 된다고. 위의 시에서 ‘나’와 ‘당신’을 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읽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나’는 ‘창문 밖’에 있는 ‘나’를 본다. 그때서야 내 표정이 어떤지도 보인다. 나는 ‘나’ 자신을 창문이라는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나 자신을 의식하고 있으므로, 언젠가는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나’를 살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더군다나 나는 “밖에는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고 연거푸 두 번 말하고 있지 않나. 구절이 반복되는 와중에 모두가 나를 비웃는 것 같은 현재 상태를 설명하던 종결어미는 과거의 상황을 설명하는 종결어미로 건너가는 의미의 문을 연다. 나는 나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귀 기울이는 과정을 통해 내가 어떤 얼굴을 하는지 바라보고, 종국에는 인간으로서의 나 자신을 스스로 들어 올리는 고양의 계기를 얻는다. “일어나 창문으로” 가는 그 몸짓을 향해 우리는 수양(修養)의 과정이란 이름을 부여해도 되겠다. 얼마 전 유진목 시인이 참여하는 수업에서 한 독자가 시인에게 “사람을 싫어하는가?”라고 물었다. 시인은 잠시 생각하더니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하지 않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 답을 결정하지 않고 생각의 여지를 마련함으로써 내내 자기 자신의 언어를 저울질하는 움직임, 물러나지 않은 그 자리에서 빚어내는 자존의 얼굴. 시인의 답을 들으면서 나는 문득 시로 사람을, 또한 삶을, 견딜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양경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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